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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적인 한계선  
 리디  posted at 2003-06-20 04:32:11
3778 hits  0 comments
 http://www.reedyfox.com NeWin reedyfox is level 39  llllllllll 
 퍼머링크 : http://reedyfox.com/island.php/column_etc/12  [복사]

조약돌의 글을 리디가 대신 올립니다.




** 딱딱한 얘기.
    전에 같이 일하던 형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을 빌려준 적이 있다.(빌려준지 반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못 받았네? -_-;) 반 강제로 떠맡기다시피 읽으라고 주었더니, 자기는 이렇게 교리적인 딱딱한 책은 싫단다. 뭐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아는 정확한 기초부터 시작할 때 세상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부여하시는 점수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한다. 다시말해 단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한다면 그 도덕적인 선의 기준은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 또는 하나님은 결코 한 세기만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뭔가 시대를 초월한 기준의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어떤 기준을 알고있느냐? 물론 아니다. (아, 한참 멋있게 나갔는데 결국 내가 제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두 없구나.. 쩝)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프란시스 쉐퍼의 ‘오늘날의 교회의 사명’(생명의 말씀사)의 부록 부분에 있는 ‘절대적인 한계선들’을 소개하면서 내 지식의 빈곤을 메꾸려고 한다. 그동안 내 글이 가깝게 느껴졌던 몇몇 분들은 다시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걱정도 있지만, 적어도 이 정도는 습득하고 있어야하지 않을까해서 이렇게 요약과 더불어 조금씩 내 견해를 덧붙여 본다. 개인적으로 한 번 더 정리하는 계기가 될 것 같고..


** 원과 벼랑
    전에 inny의 글 중에 ‘이단은 없다’라는 글이 있었다. ‘과연 이단이라는 것은 무얼까? 어느 정도의 선을 넘어야 이단이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갖게 했던 글이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유연성을 갖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나에게 새로운 개념을 정립시켜주었다. 그것은 바로 ‘원과 벼랑’이라는 것이다.

    이해를 쉽게 하기위해 결론을 먼저 언급하자면 기독교의 교리와 지적 입장은 하나의 점이 아니라 하나의 원을 제시한다 이다. 종종 느끼는 것인데, 기독교인 중 많은 사람이 자신이 속한 단체(교회, 선교단체 등등)의 교리, 심지어는 단순한 지적 견해조차도 체계화시킨다. 같은 공동체 안에 있으면 같은 사고체계를 가져야만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공동체 속에서 성장한 사람은 기존 교리의 적은 부분이라도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돌연 그 교리가 지니고 있는 견해 자체를 완전히 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층과 학생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는 이 견해가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지는데, 1학년 겨울방학 때 내가 속한 C.C.C. 기드온 순장수련회에 반 강제적으로 참석해야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문득 들었던 생각이 ‘확, C.C.C.를 떠나?’였기 때문이었다. 한창 혈기가 왕성한 시기에는 적절한 형식속에 합법적인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기독교 자체를 폐기해 버리기 쉽다.

    쉐퍼는 정통주의 그룹에서 성장한 경건한 삶을 살기위해 투쟁하는 한 젊은이를 예로 들고 있다. 경건한 삶을 살기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경계선, 즉 절대적인 한계선을 주의깊게 설정하지도 않은 채 투쟁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이것을 견뎌야 해, 그리고 저것도, 또 이것도....”와 같은 식으로 자기가 그동안 배워온 견해, 또는 그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나름의 한계선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원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염려에 빠지게된다.

    이제부터 제시할 몇가지 한계선들은 교리나 개념 등에 포함된 개념을 분석하는 방법으로 설정된 것으로 절대적인 한계선 중에 몇가지 것들이다. 이 한계선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약간 어렵게 보일지 모르지만 천천히 함께 했으면한다.


** 하나님과 중요성
    쉐퍼는 우리가 기독교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기독교는 결정론적 체계가 아니라 비결정론적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어떤 계획에 얽메이는 분도 아니고, 그분이 하시려는 것에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신다. 아니,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사랑할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창조를 하셔야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사실에의해 논박할 여지를 잃어버린다.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이미 서로 사랑하며 의사소통을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창조를 하셔야해서 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셔서 친히 창조를 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극단으로 잘못 치달으면 사람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은 웨스트민스텨 요리문답 제1항 "사람의 가장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성경의 진술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다시말해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가장 기초적인 절대적 한계선은 하나님은 자유로우시며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창조를 하셔야만 했던 분이 아니며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비록 유한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는 것이다. 여러분과 내가 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중요하다.


** 우연과 역사
    이 단락을 몇번이나 읽어 보았지만 명확하게 요약하기가 꽤 힘들었다. 짜집기만으로 요약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느꼈고, 약간 어려운 부분인 것 같아서 나름의 표현력을 발휘하다보니 더 모호해지는 것도 같고... 이번에는 절대적인 한계선을 제시하기보다는 양 끝에 있는 벼랑을 먼저 설명하는 것이 이해를 빠르게 할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이 관여하시지 않는 우연이 존재할 수 있다와 칭의의 사역에서 인간편의 자각을 거부하고 인간은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라는 식으로 인간을 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두가지 종류의 창조를 하셨다. 하나는 바람과 나무같은 비인격적인 존재들이고 나머지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다시말하면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피조물(여기에는 천사와 인간이 있다.)이다. 전자의 기계적인 인과 관계뿐 아니라 후자가 할 수 있는 선택 또한 하나님이 뜻을 가지고 우주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역사 속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종종 예정론에대한 설명을 하면서 하나님은 시간에 얽메이는 존재일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곤한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것은 신적 존재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배후에 우연을 두지 않으시며 자신이 역사를 창조하셨기에 매순간순간 역사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개입하신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칭의의 사역에대한 인간의 분명한 자각없이 전적인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다가는 인간은 무에 불과한 존재라는 결론에 이르고 말 것이다. 성경은 복음은 보편적으로 제시되었으며 또한 인간은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 통일성과 다양성
    어떤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사랑할 존재가 필요하셨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이상한 당위성의 논리를 펼친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과 동시에 진정한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본성을 지니신 세 위격의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한 발상이다. 바로 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로 하나님 안에서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여기에 인격성에 대한 모든 개념이 함축되어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안에도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가지 본성이 조금의 혼돈도 없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또한 다양성과 통일성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피조물과 창조자 사이에도 절대적인 구분이 있지만 그러면서도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에는 신비한 연합이 있다. 또한 이런 개개인의 가치가 중요함에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도 실재적인 신비적 연합이 존재한다.

    위의 각각의 경우에 두가지 벼랑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구분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혼돈이며 다른 하나는 통일성을 상실함으로 생기는 것이다.


** 거룩과 사랑
    하나님이 갖고 계신 성품 중 거룩과 사랑에 대해 살펴보려한다. 이 두가지는 동시에 다루어지지 않으면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거룩이 단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의미할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말은 하나님은 모든 것이기에 아무것도 아닌 신이라는 말과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에 적합한 도덕적 행위가 있고 그렇지 못한 행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의 거룩은 개인의 삶 뿐 아니라 교회 역시 삶과 교리 모두에서 거룩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없이 거룩만을 강조하면 반대편 벼랑으로 떨어진다는 것 또한 인지해야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시라며 사랑을 매우 강조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내용이 없거나 방향이 없는 모든 방향으로 단지 형식적으로 골고루 베풀어져야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사랑의 말들은 실천의 자취가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분은 성품을 지니고 계신다. 다시말해 사랑만이 모든 일의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사랑은 동시에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이쪽이나 저쪽 벼랑 아래로 추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 교리는 개인으로서 뿐 아니라 그룹으로서 우리의 실천과 관계된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교리와 삶 모두를 거룩하게 만든다. 그리고 진정한 거룩은 항상 교리와 삶 모두를 사랑으로 가득차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계심과 성품을 나타내도록 부름을 받았다.


** 역사의 객관성과 주관성
    쉐퍼는 이 부분에서 원하는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원사실(brute fact)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실(fact)이라는 단어는 이제 더 이상 필연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지 못한다면서... 그렇다면 무엇을 언급하기 위해 원사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 알아보자. 역사 속에서 타락이 있었다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원사실이다. 역사적 시공간적 타락의 결과로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다. 역사적 타락의 결과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타락 이전에는 세상이 비정상적이 아닌 정상적이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도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시공간적 원사실이며 그리스도의 재림 역시 그러하다. 여기에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들은 시공간적인 원사실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것을 조금 더 진전시켜 개인에게 적응시켜 보자. 만일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느 때인가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역사적 시공간적 시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역사의 미래에 완전한 구원, 즉 우리 몸의 부활과 모든 피조물의 회복이 이루어 질 것이다.

    다른 벼랑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단지 속빈 교리, 명제가 아님을 강조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떨어질 벼랑이다. 역사적 사건들을 주관적 개념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이것들은 우리 삶에서 의미를 지녀야 하며 우리의 현재 삶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순간 순간의 실존적인 삶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은 기독교 교리는 없다.

    우리 세대는 주관적인 "종교적 진리"를 강조하는데 이러한 상황이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이다. 또한 이러한 계명들이 지니고 있는 인격적 측면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다른 벼랑으로 떨어질 것이다. 우리의 목표가 비록 올바른 신학적 교리의 확립이라 할지라도 교리 그 차제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재의 매순간의 삶 속에서 우리의 모든 뜻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도록 이끄는 참된 지식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 칭의와 성화
    칭의는 단번에 이루어지며 영원한 효력을 지닌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칭의를 입었는지 여부를 물어 보아야만 한다.

    성화는 단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현재 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바와 그분의 사역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깨닫고 그 지식을 좇아 살고자 할 때 종종 위기가 발생한다.

    우리가 알려진 모든 죄로부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무익하다. 그렇지만 이런 연유로 온전한 표준이란 없다는 것을 규범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 완전하시고 빛과 아름다움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죄라는 것은 별 것 아니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 절대적 옳음과 절대적 그름
    이제 마지막 절대적 한계선이다. ^^; 어떠한 체계도 옳고 그름의 잣대로 잴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조류이지만 우리는 체계들과 범주들에 관해서는 옳음과 그름의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체계들 중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있고 절대적으로 그른 것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비기독교적인 체계는 그른 것이고 기독교 체계가 진리임을 선포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기독교 체계를 완벽하게 일관성 있게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종교 개혁자들은 여기서 중요한 개념을 생각해 내었는데 그들은 참, 거짓 교회를 구분하고 참 교회에서도 좀 더 순수한 교회와 좀 덜 순수한 교회를 구분했다. 동일한 것이 기독교 교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체계는 90%, 또 어떤 체계는 50% 정도 옳다고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교회와 교리 체계들이 옳은 것으로부터 그른 것으로 넘어갈 때 이것은 명백히 선을 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기독교의 가르침을 철두철미 완벽하게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우리의 성화도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독교의 가르침 역시 철저히 일관성 있게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균형을 취할 때 분파적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와 교리의 어떤 점에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백안시하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 통제와 원 내부에 있는 자유
    이제 요약함으로 끝맺고자 한다. 기독교는 하나의 점이나 좁고 반복되는 선이 아니라 형식을 제공하는 원이다. 이 원 내부에는 이해와 표현의 폭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기독교는 분명한 한계선, 똑같은 쌍둥이 벼랑으로 비유될 수 있는 분명한 한계선들이 있는 원이다. 우리는 늘 둘 중 어느 한 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 속에 있다. 이것은 한 극단의 교리를 피하기 위해 다른 극단적 교리를 취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하고 또한 서로를 도와야만 한다. 각각의 원 내부에는 논의를 위한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논의는 늘 원 내부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원에는 한계선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오늘날의 교회의 사명'의 부록란에 있는 '절대적인 한계선들'을 요약한 것입니다. (결코 제 생각이나 의견이 아님) 단 글의 중간중간에 아주 적게나마 개인의 의견이 들어갔으니까 그점은 이해해 주시구, 이해가 잘 안되심 직접 사서 읽어보심도 좋을듯.. (책값이 커피값도 안되여..) (2001.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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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섬 바닷가 - 절대적인 한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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