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화제가 되는 일본만화 중에 '데스노트'라는 것이 있다. 전형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라이토'라는 천재적인 고등학생이 '데스노트'를 주으면서 휘말리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데스노트'는 사신(死神:저승사자쯤으로 생각하면 될듯)이 인간의 생명을 중단시킬 때 사용하는 노트다. 얼굴을 본 사람의 이름을 데스노트에 적으면 일정 유예시간을 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죽는 방법까지 적으면 적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된다.
주인공 라이토는 이 데스노트를 손에 쥐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며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하는 전세계의 흉악범들을 하나씩 하나씩 처치한다. 그러나 그의 정의에 근거한 내심의 기준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데, 범죄자들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일이 급격히 빈발하자 수사에 돌입한 형사를, 라이토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이끌려 죽여버린 것이었다. 이후 그의 행적은 데스노트를 쥔 일종의 무소불위의 권력자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이 데스노트라는 만화는 읽는 사람의 양면성을 자극함으로써 작품의 본질적인 매력을 형성한다. 우선 모든 사람은 사회생활과 교육 속에서 인격을 형성해 나가며, 그 가운데 하기 싫어도 해야하는 것과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체득한다. 반면, 그런 반복되는 자기학습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내재된 악의 성정은 죽을 때까지 뿌리 뽑을 수 없는 것이어서, 생각으로 폭행하고 손괴하며 살인을 저지르기도 서슴지 않는다. 그럴 진대, 수많은 절차와 제도를 거쳐야만이 미약한 정의가 실현되는듯한 이 뜨뜻 미지근한 사회정의구현 시스템에는 도저히 만족이 되지 않으며, 그 결과로 자신의 법감정에 따라 모든 사건이 처리되었으면 하고 오매불망하던 자에게 데스노트가 덜컥 주어진다면 그 뒷일은 달리 깊이 살피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왜일까?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 정의에 위해(危害)가 되는 일이 포착되었을 때에라도 잠시 번거롭겠지만 한 번 더 생각하고 혹시 스스로의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다시 상정해보는 자세는 절대선이다. 포털 사이트에 수시로 올라오는 자극적인 뉴스를 읽으며 '저런 놈은 볼것도 없이 팔다리 잘라서 죽여야 해'라거나 '자동차 뒤에 매달아서 서울시내를 시속 200킬로로 달린 다음에도 살아 있으면 용서해주지' 따위의 댓글 달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무죄가 추정되는 피고인으로서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고 재판을 받으며 사실심과 법률심으로 한 차례 더 억울함을 토로할 수 있다. 그 피고인이 특별히 선해서, 측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그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기에 관용되는 내용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정지선을 넘어서 멈춘 자동차를 보고 '저런 운전자는 다 사고나 나서 뒤져라'고 저주한 것이 어느 날 실수로 딱 한 번 정지선을 넘겨 정차한 내게도 엄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면 나는 결코 그 같은 저주를 입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정지선을 넘긴 운전자는 과태료와 벌점으로 응당 받을 댓가를 치를 수 있다. 그것이 우리 내심의 법감정과, 현실에 적용되는(혹은 적용되어야 할) 절차와 제도가 갖는 간극이다.
생각컨대, 누리꾼(블로거 포함)들에게도 이 데스노트가 한 부씩 손에 들려져 있는 것 같다.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상대의 입장은 무엇인지, 사건의 앞뒤는 어떻게 된 것이며 혹시 내가 모르는 상황이 개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는 배려가 필요함에도, 우리 누리꾼들은 정의감에 투철한 자신의 법감정에 고무되어 즉시로 그의 이름을 데스노트(홈페이지, 블로그, 게시판 등)에 적어 넣는다. 효과는 만점이다. 문제는 라이토에 의해 무고하게 죽어나간 희생자들처럼 누리꾼들의 데스노트도 대상을 가리지 않고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 더도 말고
'네이버 스킨 표절 사건'
만 돌아보자. 우리, 얼굴이 화끈거려지지 않는가.)
나에게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회지로 나온 와이티 님의 만화를 스캔해서 이곳
생각하는섬 자게에 올린 일이 있다. 그야말로 별 생각 없이 올린, 변명할 여지 없는 내 잘못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전자우편을 한 통 받는다. 와이티 님이 보낸 것이었다. 귀하의 홈페이지(누리집)에 내 만화가 올려진 것을 보았다, 나는 회지 만화는 인터넷(누리그물)에 올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해명을 바라며 충분한 이유가 없다면 속히 삭제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웃대 같은 곳에 부지기수로 불펌을 당하며 비일비재하게 겪는 일이라 피곤하고 짜증도 났겠지만 그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이 가장 합당한지에 대한 개념이 서 있었다. 누리그물 역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며 따라서 오프라인에서 적용되는 '일의 순서'도 같은 줄기에서 온라인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누리집이나
생각하는섬에 단 한줄도 이 같은 사실을 터뜨려 분노를 표시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한 것이 내게 사적으로 전자우편을 보내어 정중히 해명을 요구하는 배려깊은 행동이었다. (나중에 내가 사과의 전자우편을 보내자, 와이티 님은 자신의 누리집에 올려진 신고글 본문에 있던
생각하는섬의 링크도 '원만히 해결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삭제했다. 내게 혹여나 불필요한 피해가 있을까를 걱정한 탓이다.)
물론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내 부주의 함'과 함께 '악의 없음'을 들어 용서를 구하는 답장을 썼고 즉시 문제되는 만화를 삭제했으며,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생각에 그의 누리집 게시판에 사과글까지 남겼다. 그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와이티 님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자신의 게시판을 이용해 나를 공개재판에 처했을 수도 있다.
생각하는섬에도 글을 올려 많은 사람들에게 망신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자유다. 하지만 와이티 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와이티 님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 않는다. 본인은 몰라도 지켜보는 사람은 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일의 순서라는 것이 있고 그것으로부터 성품의 향기는 퍼져나간다. 누가 말로 설명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라도 어느 누군가가 데스노트를 들고 세상을 정화하겠다 나서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든 누리꾼들에게 데스노트는 한 권씩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자. 내 손끝에서 적혀져 나가는 글자 하나 하나가 내 부주의함의 희생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적고 보니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글이다.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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