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원 수표의 가치' 예화는 여러분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제 인터넷 브라우저의 즐겨찾기 항목에 '글로 쓸 내용'이라는 폴더가 있는데, 오래 전에 거기에다
이 예화가 담긴 웹페이지
를 등록해두었습니다.
말 그대로 언젠가 이 예화에 대해 글을 쓸 요량이었습니다. 어떤 내용인고 하니, 10만 원짜리 수표의 가치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단순히 구기거나 밟기만 하고서 '그래도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고 말하는 건 눈속임에 불과하다, 그 수표를 여섯 달 동안 똥물에 푹 삭혔다거나 극단적으로 불로 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해도 그 가치가 여전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따위의 말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즐겨찾기 목록에서 그 예화를 다시 한 번 찾아 읽고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제가 참 마음이 어두운 시절을 보냈구나 하는 생각에서죠. 완전한 예화는 없습니다. 어떤 예화건 기본적으로 이해를 돕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예화가 논리를 증명하지는 않지요. 따라서 예화 속에 내재된 논리 구조는 때로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 논리 구조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제에 대한 폭넓은 이해, 즉 말하는 사람이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가에 대한 환기인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로, 예화를 통해 주제를 보다 잘 전달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한계이자 제한 지침이 될 수가 있습니다. 즉, 예화가 주제의 이해를 돕는 것을 넘어 예화 자체의 논리 구조가 상대방에게 강요될 때에 이미 그 예화는 예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청지기의 예화를 보면, 그가 분명 주인의 채권을 부당하게 소멸시키는 배임행위를 했음에도 예수님은 이 청지기를 칭찬하십니다. 여기서 예화 내용이 정의롭지 못한 것을 두고 "이게 말이 되느냐", "우리도 저렇게 행동을 해도 된다는 얘기냐"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예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세속적이고 악한 세상 사람들조차도 장차 닥칠 미래를 어떻게 해서든 준비하려고 발버둥치는데 하물며 믿는 사람은 더욱 지혜롭게 열심을 내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말하는 사람이 예화에 빗대어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 예화 자체의 논리 구조(의 완전성)는 별개의 층위(layer:레이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포토샵이나 웹페이지에서 각기 다른 레이어 속의 변화는 2차원적으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예화의 논리 구조는 주제의 정당성과는 별반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그것이 주제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예화의 논리 구조를 규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예화 속의 논리 구조가 흠결이 있음을 지적하며 화자의 말에는 귀를 닫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핵심에 집중하지 못하고 곁가지만을 붙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에는 관심을 끊은 채, 그가 먹었던 것, 만났던 사람들, 행실들을 집요하게 꼬투리 삼아 정죄하였던 자들처럼요.
실제로 이런 사람들은 많은 동료들과 조직을 피로하게 만듭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사람들과 조직에 오히려 열심을 가진 자들이란 사실입니다. 그 열심이 가시로 커가고 있음에도 스스로 소금이라 자부하는 이들입니다. 완전한 예화는 없는데도 그들은 언제나 완전한 예화를 요구합니다. 설령 원하는 완전한 예화가 주어지더라도 그 예화가 종국에 던져줄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을 그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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