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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올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이 있어 찾아보니 안 올렸나 봅니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었다. 별도 달도 잠이 들고 일직하사랑 사관도 곤히 잠든 시간이다. 행정반엔 혼자다. 국군 장병들에게 보장된 하루 여덟 시간 취침은 내겐 그리 익숙하게 들리지 않는다. 성숙해진다는 낱말은 점차 형편을 알아간다는 말과 대치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많이 알아간다. 우리는 갖은 일들을 몸으로 생각으로 부딪히며 많은 것을 알아간다. 많은 것들을 알아간다는 것은 실체를 보다 현저하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성숙해진다는 단어가 사람살이의 키치적 냄새를 풍긴다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람살이를 이해한다면 - 즉 '성숙해진다면' - 서글픈 치역에 도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단에 일이 있으므로 공용을 다녀왔는데, 일보에 잡히지 않은 밥을 퍽이나 즐거운 표정으로 먹고 있는 나를 발견한 P는 선뜻 식기를 들고 나와 합석했다. 그런 식의 대화는 언제나 '참 오랜만이다'라는 이디엄으로 시작하게 마련이다. 그 녀석은 내 더블백 동기였고 그는 이곳 단에, 나는 북한강쪽의 직할 중대에 떨어졌다. 그는 참모부 행정계원이다.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외관과는 달리 이달에만 세 번 쓰러졌다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정신을 잃고 깨어나보면 의무과였노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곤 다시 사무실로 가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쌓여있는 일더미였다.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수면부족이었다. 아, 잠을 못 자면 쓰러지는구나 하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간부들이 그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야근하는 병사들에게 일찍 들어가 자라는 말 한 마디의 배려를 잊지 않는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그들은 이렇게 되묻는 것을 잊지 않는다. 어제 시켰던 그거 빨리 내놓으라고..... 그들에게 있어 일을 시키는 대상은 일찍 자도록 배려하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으며, 동시에 배려하는 대상은 업무의 결과를 추궁하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건 놀랍도록 간편하고 놀랍도록 철저하다. 일찍 자라는 말만 믿고 일찍 잤다간 아침에 호되게 당할 걸 각오해야 한다. 일찍 자라는 말은 다만 일찍 자라는 말이지 업무를 보류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형편이 이전과 다른 것은 '일찍 자라'는 따뜻한(?) 말을 들었다는 것뿐, 어찌되었든 그는 밤을 새더라도 아침까지 일을 처리해야 한다. 간부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완성된 업무결과다. 그들은 병사가 밤을 새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그뿐이다.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는구나. 너도 이게 살찐 것 같지? 이건 살찐 게 아니라 부은 거야. 잠을 못자서.....
군대를 학교와 함께 국가의 야만성이 가장 충실한 곳이라 한 것은 참으로 들어맞는 표현이다. 60만명의 애매한 젊은이들이 '도리없이 처한' 야만성 속에서 나름대로 신성한 국방의 의무니 뭐니 하며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그 얄팍한 최음제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치르지 않는 일부 선각자들(또는 선각자들의 아들들)에 대한 분노가 우월감이 아닌 억울함으로 배어나면서 그 치졸함을 드러낸다. 그 덕택에 안정적 이득을 보는 것은 국가가 운영하고 있는 군대체제다. 나이 스물을 갓 넘긴 청년들이 연봉 20만원에 수행하고 있는 국방의 의무는 분명 착취임에도 불구하고 그 착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통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군대 가면 사람된다고들 하는데, 군대 갔다와서 되어온 그 도대체가 '사람'이란 것들이 사회에 득시글거림에도 이 사회는 여전히 '사람'같지 않는 것들이 득시글거리는 사회 그대로의 사회다. 군대 갔다오면 사람된다는 얘기가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어 누구를 통해 이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진지한 생각을 근거하여 꺼낸 거라면 그는 틀림없이 심각한 사회적응 장애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며, 그냥 생각없이 입밖에 내뱉은 거라면 그는 정말 쓰레기다. 군대에 가서 혹 찌끄러기 같은 유익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군대가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초토화시켜버리는 지를 알게 된다면 도무지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참모부 행정계원인 내 동기에게 나는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우리는 늘 그렇듯 간부를 씹으며 대화를 끝냈다. 그 정도로 수습하는 게 속 편한 매듭이다. 우리는 성숙했기에 결코 건드릴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선 일체 침묵했다. 그런 점에서 틀림없이 우린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에 의심이 없었다. 낮에 만난 내 동기가 다시 떠올랐다. 이 늦은 시간에도 그는 도리없는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겠지..........
(200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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