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화제라는 <파리의 연인>을 몇 편 봤다. 한기주(박신양), 강태영(김정은)이라는 개성 확실한 캐릭터와 흥미를 돋우는 에피소드가 뼈대인데, 그뿐이다. 살이 없다. 일부러 연필심 부러뜨려 가며 새로 산 연필깎이를 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누군가 봤더니 김은숙 강은정 씨, 신인이다. <파리의 연인> 어록이라 회자될 정도로 괜찮은 문장들을 몇 개 선보이긴 했지만, 연필깎이 자랑용이지 싶다. 극 전반을 아우르는 단어선택이나 호흡조절에는 대단히 서투르다.
인터뷰를 보니 '사람 냄새 나는 대본을 쓰려 노력하고 있다' 한다. 그런 노력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한 부분을 들어보자. 약혼녀 행세를 하기로 한 김정은 때문에 큰 계약을 망친 직후 둘이 나누는 대사다.
http://reedyfox.com/bbs/z200407/1/lovers_in_paris.wma
김정은 : 자고 가란다고 자고 가고.... 돈 받고 저녁식사 참석해주고.... 그런 여자로 보였을 수 있겠네요. 내 잘못이네. 여기 오지만 않았어도.......
박신양 : 강요한 적 없어.
김정은 : 알아요. 안했어요. 강요 안했죠. (쳐다보며)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었죠. 내 도움이......
'내 잘못이네'. 이 대사에 꽤 신경을 썼으리라 생각한다. 김정은이 박신양에게 '내가 비록 궁색하게 행동했지만 그런 여자는 아니다. 당신,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다.'라는 의도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며 박신양을 비난하는 부분이다. 자책하는 듯한 뉘앙스와 함께 짧은 문장임에도 그런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 생각한다. 두 작가가 말하는 사람 냄새 나는 대본이란 게 이런 걸 가리킨다. 문제는 그런 작가의 의도가 일관되게 흐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김정은의 두번째 대사에서 '내 도움이......'는 정말 최악의 대사다. 앞에서 '내 잘못이네'라고 말하는 김정은과 '내 도움이......'라고 말하는 김정은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녀의 심리는 이런 거다. '그래, 당신은 완벽하게 처신했고 결국 내가 잘못 행동한 게 되는 거구나. 그래도 당신은 그러면 안되는 거야.'
(굵게 표시한 '도움'에 악센트를 주어 발음한 것을 잘 들어보라. 김정은도 극중 강태영의 심리가 그런 것임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내 도움이'는 앞뒤 계산 다 한 노련한 여인의, 자괴감이 삭제된 대사다. 앞서 칭찬한 그런 대사를 말하는 김정은이 줄곧 관철된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야 옳다.
김정은 : 알아요. 안했어요. 강요 안했죠.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었죠.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짧게 끄덕거리며 들릴듯 말듯) 도움... 도움......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김정은은 계속해서 다른 김정은으로 돌변한다. 저런 사람이 있을 법 하다고 믿어지는 박신양과 달리 김정은이라는 인물 자체가 대단히 작위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의 일정부분은 거기에 있다. 연기자가 극복할 수 없는 대본의 부족함이다. 캐릭터와 에피소드의 재미만으로 상쇄시킬 수 없는 이 드라마의 약점이기도 하고. <네멋대로 해라>가 막 그리워질라고 그런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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