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백으로 이어진 앞글 :
천재형 노력형
ari 님 글의 요지는 이렇다. 천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뛰어난 지적 능력을 소유한 자들이 아니라 다만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노력하고 한 발 앞서 준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노력과 준비가 범인들이 만들어낸 천재들의 사실상의 외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천재를 본 사람이라면, 아니 천재까지 가지 않더라도 준재쯤 되는 사람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생각이 좀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학교에 유명한 녀석이 하나 있었다. 그녀석의 이름은 김민석,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 그의 특징은 잠이 많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깨어있는 모습을 보기 힘들 정도로 책상에 엎어져 자거나 꾸벅꾸벅 조는 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러다가도 쉬는 시간에는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신나게 농구를 하기도 하는데 그리곤 다시 수업내내 잠을 잤다.
밤 9시 넘어서까지 계속되는 야간자율학습(야자) 시간에도 별 차이는 없었다. 야자를 감독하는 선생이 없었다면 턱을 괴고 건성으로 책을 훑는 성의마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선생들이 하던 말을 빌어, '엉덩이가 썩어문드러지도록' 책상머리에 붙어 있던 모범생들의 목표의식 따위는 그에게 매우 가소로워 보였다.
선생들도 그런 그가 달가울리 없었다. 걸핏하면 교재없이 우두커니 앉아있거나 엎어져 자고 있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 그의 무성의에 평정심을 잃고 그만 분통을 터뜨리며 죽사발이 되도록 주먹을 날렸던 윤리 선생을 빼고는 - 아무도 없었다. 왜냐? 그의 성적이 전교 수위를 달렸기 때문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매사에 나른했던 그가 정색을 하며 눈빛이 달라지는 때가 있었다. 시험당일 그는 평소보다 10~20분 일찍 등교해서는 중위권 鵑捉풔?착실한 아이들의 노트를 빌린다(성적은 안 나와도 노트필기는 기가 막히게 잘 하는 애들이 있다). 자리에 앉아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그것을 읽는 것이다. 그게 그에게 있어서 '공부'의 전부였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김민석은 다른 학생들이 놀고 있을 때 자신이 해야할 모든 것들을 미리 해두었기에 천재처럼 보이는 것뿐인가? 일단 그점에 대해서는 '공부의 시간적 절대량'을 체험한 나와 내 친구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평균에 못미치는 기억력(암기력)이 결정적 문제점이었던 나는 다른 아이들이 한 번 읽고 암기할 수 있는 것들을 동일한 농도로 습득하기 위해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국사, 세계사 등의 기본 암기과목 같은 경우는 시험기간마다 교과서를 10회독 이상 하고서야 비로소 줄거리가 파악되었던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김민석은 3학년 교과과정을 2학년 혹은 1학년 때 미리 암기했던 걸까? 더 나아가 중학교 때 고등학교 과정을 이미 '뗐기 때문에' 모든 수업시간에 잠을 자도 너끈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보다 확연히 뒤쳐졌던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도 적어도 내가 잘 알았던 몇 명만큼은 그런 가설의 명백한 반례가 된다. 중학교 때부터 평균 이상의 노력과 함께 그 수확으로 우수한 성적을 받아왔던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입에서 단내가 날때까지 자리를 뜰 줄 몰랐던 공일환 같은 녀석이나(경찰대에 진학했다), 평균 1~2점의 등락에 몹시 충격을 받으면서 절치부심하며 책을 파고 들었던 이병연의 그 집요함을 기억한다. 아침 6시 조금 넘어 학교에 도착 밤 11시 45분 전철 막차시간까지 시간과의 싸움을 했던 - 질이 받쳐주지 않으면 양이라도 많이 투여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당시의 나를 지배하던 주된 정서였다 -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김민석이 했던 것만 못한 노력을 했다곤 생각지 않는다.
공일환, 이병연 그리고 나와 같은 아이들에게 더욱더 큰 허탈감과 좌절감을 안겨줬던건,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험 당일 아침에 노트를 1시간 정도 들여다본 천재의 성적이 훨씬 월등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1시간 노트를 읽는 것조차 그에게는 마지못해서 '해주는' 요식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는 그나마의 공부 자체를 귀찮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는 노력의 산물일뿐, 생득한 특별한 지적 능력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 다음이 이삭인지 야곱인지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우리 어머니의 지적 능력과 나의 그것이 -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 부인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이듯, 천재와 범인 사이에는 마찬가지의 부인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그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노력하여 천재에 가까이 이르는데 성공한 범인들을 일괄하여 천재로 인식한 오류에 기인한 결과일 것이며, 태생의 불공평한 경쟁의 책임을 '못난 범인'들에 돌려 천재들의 우월성을 돋보이게 하는데 더없이 훌륭한 변론이 될 것이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라 하지만 그건 다 애들 힘내라고 하는 소리다. :) 내 경험처럼 시간의 절대량을 실감하는 수준까지 노력을 한다면야 천재가 '마지못해 하는 수준'까지는 근접할 수 있겠지만, 거기부터는 그야말로 '천재들의 홈그라운드'다.
명 오늘 
명
PRINT Text
PRINT 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