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근간에 적십자를 때리는 보도가 자주 나오고 있다. 지난 번 에이즈 감염 혈액이 그대로 수혈된 사건이 터진 이후로 자주 등장하는 이런 보도들을 흔히 고발성 보도라고 한다. 고발성 보도라...... 이 고발성 보도를 살짝 뒤집으면 뭐가 되는지 아는가? 때리기 보도다. 말 그대로 대상을 두드려 패기 위해 쓰고 찍는 기사와 화면이 바로 때리기 보도다. 이건 국민에게 잘못된 현실을 알리자는 것보다, 그러한 현실을 시정 개선하기 위해 공감대를 형성해 가자는 취지보다, 상대를 까발린다는 가학적 즐거움을 위함이 더 크고, 거기에 기자 자신의 공명심이 가미된다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몇몇 보도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 때리기성의 의혹이 짙더라 이말이다.
이런 때리기 기사를 접한 시민들의 반응도 참으로 성숙하기 그지없다. 관료사회가 다 그렇다느니, 공무원이란 공무원은 죄다 잡아 죽여야 한다느니 하는 케케묵은 이발소 이야기들은 면역이 되었다 치고라도, 지난 주 토요일에 헌혈을 했는데 이런 줄 알았으면 안했을 거라는니, 내 더러워서 다시는 헌혈을 하냐봐라느니 하는 반응이 주종을 이루는데, 이것 참 난감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기자에 그 독자라고, 아닌 말로 헌혈거부 캠페인을 벌이고 그에 적극 동조하는 시민이란 말인가?
2. 보도와 관련하여
에이즈 혈액 관련 보도를 단발성 기사로 내보낸 여타의 일간지/방송국과는 달리 오마이뉴스는 지속적으로 헌혈(혈액) 관련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데, 26일자로 메인에 올린 기사가 가관이다. 내용의 요지는 이렇다.
2주전 서부혈액원은 혈액보관 냉장고의 고장을 이유로 300여개의 혈액을 폐기했고, 돈으로 변상하는 수준에서 내부징계를 끝낸 것으로 드러났다. 서부혈액원측은 "2주전 300여개의 혈액(적혈구)이 폐기되었고, 담당자에 대한 엄중경고와 함께 600만원을 변상하는 선에서 징계를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사고원인에 대해 서부혈액원측은 "혈액을 보관하는 냉장고가 고장나 혈액이 얼어붙는 일이 발생했다"며 "4시간마다 관리자가 냉장고를 체크하는데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손을 쓸 수 없다"고 밝혔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뽑은 헤드라인이 ''국민의 피' 무더기로 폐기하고 쉬쉬' 이고, 부제가 '서부혈액원, 관리부주의로 300개 폐기...변상이 전부' 로 되어 있다. 오버 아닌가? 관리소홀이건 뭐건 간에 냉장고 고장으로 혈액 300포가 얼어 이를 폐기처분했고, 담당자에게 엄중경고(아마 시말서 작성일듯)와 함께 해당 피해액을 변상케 했다는 내용을 가지고 마치 아까운 혈액을 이유없이 폐기한듯한 어조에다가 문제 자체를 쉬쉬했다는 취지로 제목을 잡은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변상이 전부'라고 부제를 달았는데, 명백한 날조 아닌가. 이 정도면 조선일보를 찌라시라고 부르는 게 무안해질 지경이다.
오마이뉴스의 주장대로라면 서부혈액원은 뭘 했어야 한단 말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부주의하여 혈액을 얼려버린 직원을 자체 징계하고 변상조치 했다며 일간지에 3단 광고라도 내었어야 한단 말인가? 아님 신문사마다 보도자료라도 돌렸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기자회견이라도 열었어야 만족하겠는가?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서부 혈액원이 혈액사업본부에 이 일을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궁색하게 몰았는데, 세상에, 직장 다녀본 사람들은 생각해보라. 조직마다 업무체계가 있고 흐름이 있다. 업무규정에 따라 처리하는 모든 내용이 실시간으로 상급기관으로 보고되어야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혹간 분기결산시에 '징계 및 처리결과' 라든가 '발생사고' 보고 항목이 있다면 그에 포함되어 올라가는 게 정석이다. 흠집잡기에 골몰한 기자눈에는 그런 상식마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지......
쉬운 예로 설명해보자. 한국담배인삼공사에서 인삼 현지재배지로부터 직송해오는 과정에서 운전을 담당한 직원의 부주의로 차가 전복, 옆의 개천에 인삼이 모두 빠져버렸다. 업무규정에 따라 운송파트의 장(長)의 지시로 젖은 인삼을 전량 폐기하는 한편, 해당 직원의 부주의에 대해 엄중경고(시말서나 감봉 따위가 될 것이다.)하고 피해액 전액을 변상토록 조치했다 치자. 그런데 오마이뉴스 기자는 농민이 피땀 흘려 재배한 인삼을 한 트럭이나 폐기하고 쉬쉬하려 했다며, 그럼에도 운송파트에서는 인삼공사 본부에는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며 몰아댄다면 이게 어디 어불성설인가? 30사단 수색대대 1중대 2소대 김병장이 박일병 한 대쳤는데 왜 그걸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냐고 따지는 격이다.
이 같은 호도는 같은 기자가 작성한 오마이뉴스의 지난 기사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었다. 적십자 혈액사업본부의 인력배치표를 바탕으로 작성된 이 기사는 "국민에게 적극적인 헌혈 참여를 호소하는 적십자가 시민들의 헌혈을 담당하는 일반 헌혈차량의 인력은 줄이고 도리어 혈액담당 인원을 군부대 헌혈차량에 투입하는 모순적인 행동을 보인다"며 신랄한 비판을 날렸다.
역시 난센스다. 관심을 가지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시민들의 헌혈율은 극히 낮은 편이다. 수치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가까운 헌혈 차량에 나가보시라. 기다려서 한 시간에 헌혈자 두세 명 받고 있는 형편이다. 유료로 알바까지 고용하여 헌혈을 독려하고 있음에도 그와 같은 상황이거늘, 현실을 무시한채 필요없는 인력만 버스에 가득 채워두면 어쩌잔 얘긴가. 차라리 그 시간에 안정적 혈액량을 확보할 수 있는 군부대 쪽에 유휴인력을 돌리는게 합당한 결정임은 누가 생각해도 당연한 얘기다.
뿐만 아니라, 혈장 헌혈을 권유하는 이유에 대해 "혈액제제의 원료로서 혈장이 '돈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섣부른 단정은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만든다. 혈액사업본부에서 혈장 헌혈을 권장하는 것은 자급자족하고 있는 전혈과는 달리 혈장 성분은 필요량 25% 이상이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가지고 모순적인 인력배치 운운하며 트집을 잡는 것은 선듯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직 때리기 위한 기사 작성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믿음을 갖고 그럼에도 일반차량에 인력배치를 하라는 건지........
3. 일부시민의 반응과 관련하여
위에 열거한 찌라시성 기사를 접하고 시민들이 대뜸 한다는 소리가, "더러워서 헌혈 안한다"다. 내가 단언하는데, 이들의 생각은 대단히 어린아이와 같은........ 아니, 대단히 소아적인 발상이다. 생각이 어찌 그리 짧은가.
지하철 파업과 의사 파업의 차이점은 이렇다. 전자는 시민의 불편을 담보잡았지만 후자는 시민의 생명을 담보잡고 장난을 한다는 점이다. 그 차이다. 그 차이 때문에, 파트 타임을 돌리면서 자신들의 작은 권리를 주장했던 간호사 파업과는 달리, 일체의 진료행위를 거부한 의사 파업이 국민들에게 질타의 화살을 맞았었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문제가 있다면 그건 혈액사업본부, 간단히 말해 적십자사다. 그들의 조직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부분은 나 역시 공감하고 있는 터, 그러나 그 문제점 때문에 헌혈을 하지 않는다는 발상은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수동적인 의미에서 단지 더럽고 치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이 헌혈해 온것은 적십자사에 대한 자비심과 긍휼함 때문이었냐고. 그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헌혈하는 이유는 알량한 헌혈증 하나에 미처 담을 수 없는, 낯도 모르는 이들의 간절한 외침에 대한 소리없는 대답 아니던가.
또 하나, 그것이 적극적인 의미에서 헌혈율을 떨어뜨리고 나아가 적십자사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함이라면, 더더욱 난감하다. 무슨 인질범 놀이라도 하잔건가? 우리나라 혈액수급 상황 중에서도 특히나 달리는 것이 혈소판 성분혈액이다. 수술을 할때 전혈 수혈과 함께 공급되어야 하는 상황이 많고 특별히 재생불량성빈혈(소위 백혈병) 환자는 혈소판 생성력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혈소판 성분혈액을 공급받지 못하면 생명이 위독해진다. 더구나 보존기간이 5일 이내이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오직 국내 헌혈자들의 참여의식 여하에 백혈병 환자들의 생명이 달려있는 셈이다.
따라서 헌혈 참여 여부를 가지고 적십자사를 압박하겠다는 건 마치 인질을 한 명씩 한 명씩 죽여가며 요구조건을 얻어내겠다는 논리와 같으며 도저히 머리에 뇌가 든 사람이라면 생각해낼 수 없는 초유의 아이디어인 것이다. 어찌 사람 목숨을 담보잡아 개혁을 성취할까보냐.
4. 정리하며
고발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 고발이 진정한 의미에서 호소력을 가지려면 균형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보도를 보면 한 건 올리겠다는 기자의 공명심만 팽배할 뿐, 대상에 대한 이해도 없고 객관적인 균형감각은 깡그리 실종되었다. 안 될 일이다. 기자부터 반성해라. 당신 가족중에 백혈병 환자가 생기고 나서야 스스로의 잘못을 깨달을 텐가? 적십자에 대한 문제제기는 보도를 통해 조직 혁신에 대한 공감대를 키우고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되는 데에 주안점이 맞춰져야지, 대상에 대한 증오를 확산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란 말이다.
기사에 놀아난 어린아이같은 시민들도 반성해라. 사람 목숨 그렇게 함부로 보는 게 아니다. 당신이 '더러워서' 안준다는 피 한방울에 환자들은 생명을 건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 일수록 정작 평소에 헌혈 몇 번 안 해보고 되려 헌혈 하려는 다른 사람들만 발목잡는 자들이다. 실제로 10회 이상의 다회 헌혈자들이나 등록헌혈하는 혈소판 성분 헌혈자들은 자신들의 피 한 팩 한 팩이 얼마나 절실하게 쓰이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절대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명 오늘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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