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중위 이야기
원래, 욕이란 세상에서 가장 저속한 무리들이나 사용하는 것이라 생각하던 내가 욕을 하게 된 것은 2001년도 5월부터다. (집 전화를 포함해 딱 세 개의 전화번호만을 기억하고 있는 내 능력으로 욕을 하기 시작한 때를 그리 확고하게 인지하고 있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고1때부터 '존나', '씨발' 따위가 어원상으로 몹시 입에 담기 곤란한 형편을 가지고 있음을 심각하게 연구한 나는 '어찌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리 경건하지 못한 언어를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는 비상한 결의로 차후의 언어생활에 임한다. 일단 친구들도 '욕을 할 줄 아는' 무리들과 '할 줄 모르는' 무리들로 은연중에 가름하며 나의 초경건 고지식 생활신앙은 스킬렙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욕을 - 아주 잘하는 건 아니어도 - 하게 된 건 엄청난 발전(이런 것도 발전이라면...)이 아닐 수 없다.
앞에 적은 바, 일대 변화를 가져온 건 다름아닌 S중위였다. 일생을 살며 나 말고 다른 이의 삶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다면 그는 분명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S중위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나와 함께한 3달여 짧은 시간동안 그 누구도 하지 못한 깊은 영향을 내게 미쳤다.
단란한 관계를 유지했던 L중위가 급작스런 전출통보를 받고 S중위가 전입해 온 것은 2001년 4월말이었다. 그는 연병장에 도열한 백여명의 중대원 앞에서 메모까지 해둔(!) 인사말을 읽기 시작했다.
"먼저 여러분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오~ 그 당시 아직까지 홀리 스탠다드 크리스찬의 때를 미처 벗지 못했던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공식석상에 선 군인의 입에서 '하나님' 이야기가 저리도 자연스럽게 나오다니..... 그가 우리를 만나 하나님께 감사했다면 나는 그를 만나 감사하다고 하나님께 잠시 귓말을 보내고 있었다. 저런 멋진 크리스찬을 우리 부대에 보내주시다니.....
그때의 내 생각은 얼마나 엄청난 착각이었던가. S중위에 대한 선망이 실망으로 실망이 저주로 바뀐건 1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잘라 말하자면, 그는 편집증적인 업무스타일과 변태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는 크리스찬이었다.
그의 편집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단 본부의 인사장교로 일하다 전입(사실상 좌천)한 그는 자신의 이력에 걸맞게 부대의 모든 인사행정 서류를 새로운 양식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내 PC에 저장된 기본 행정파일이 무려 3백50개가 넘었다. 그걸 다 새로운 양식으로 바꾸라는 게 그의 간단한 주문이었다. 행간, 자간, 장평, 글자크기, 단락구분, 제목번호 등등.......
일단 그의 존재로 인해 생긴 부대의 가장 큰 변화는 A4 용지의 기하급수적인 소모였다. 초안을 받아 든 그는 일단 내용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양식에 어긋난 부분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게 모두 자기 마음에 든 다음에야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수정안에 수정안을 거듭해 완성안이 나오기까지 3∼4번 전문을 출력하여 그의 손에 쥐워 주어야 했으므로 A4 용지가 왜 그렇게 많이 들어갔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양식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스페이스바 한 개냐 두 개냐 정도는 약과고, 행간 159%와 161%는 그의 눈에 왕복 16차선 이상의 차이를 가지나 싶을 정도였다. 그가 공문을 읽기 위해선 안경이 아니라 버니어 캘리퍼스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한편, 그는 인간관에 있어서 편집증 못지 않은 변태성을 보여주었다. 교육을 한답시고 행정병들을 불러 30분간 연설을 했는데 그 명연설의 내용인즉, 너희들에게서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박탈하겠다, 내가 시키는 것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뛰어와서 즉시 수행해야 한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일체의 이의제기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S중위에게 있어 사병이란 아미스타드 호 밑바닥에 엎드린 흑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S중위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나는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평안도 아무 물정 모르는 이등병이나 전역을 얼마 안남긴 꺽인 병장에게나 소용이 있을런가, 알상병인(아직 한 군생활보다 할 군생활이 더 많이 남은) 내가 가장 행복한 시간은 기도할 때가 아니라 잠을 자는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라. 일이 아닌 일을 가지고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정작 해야할 일과 수의업무(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업무)는 자연 야근으로 넘어간다. 모자라는 잠과의 눈물겨운 싸움이 나날이 이어지자 숫제 그건 고문에 가까운 스트레스였고<'어느 날 밤에' 읽어보시길...> 5월 둘째주 저녁나절 나는 결국 담벼락에 주먹을 짓이기고 있었다.(여자친구와 헤어지고서도 내색 않았던 내가 군대에서 처음 눈물을 흘린 것도 그날 일이다.....)
피딱지가 앉아 엉망이 되버린 오른 주먹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살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욕이다. 여러분은 아는가 모르겠다. 욕이란 게 정신건강에 대단히 유익하다는 사실을. S중위의 얼굴을 밟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나는 돌아서서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물론 맘속으로 그랬단 뜻이다. -_- )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게 그 당시 매일매일을 내가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한 그리스도가 되어주었다.
## 신앙고백 또는 신앙학습
내 살이에 확연한 발자국을 남긴 S중위가 정작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신실한, 너무나 신실한 크리스찬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주둔지인 경기도 남양주에서 출석교회가 있는 경기도 광주로 매주 예배를 참석하는, 열심있는 사람이었다. 말씀생활을 하는 진중한 크리스찬이었으며 아침마다 QT도 어김이 없었다. 차라리 그가 사악한 넌크리스찬이었다면 내가 성전을 선포하고 불의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주의 이름을 선포하는 흉내라도 내보련만 그는 '주의 사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S중위가 당직근무를 선 다음날 아침 행정반 청소를 하고 있던 나는, 열중하여 신앙서적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다. 책 제목이 이랬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그것을 보고서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한 마디가 있었다. '그래, 새꺄! 정말 니 안에 하나님이 없다!!')
날라리도 아닌, 내 안에 하나님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는 통절한 심정을 가진 크리스찬이 내게 그리도 큰 고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100여명 전 중대원에게서 '개새끼'로 지목받는 S중위는 진정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신앙의 참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떤 판단이 우리에게 허용되는걸까?
이미 혼란의 전초전은 수년 전에 시작되고 있었다. 입대전 이리저리 방황하던 나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기회가 없으리란 생각에 호프집 알바를 시작했다. 출근하기 시작한 업소에서 함께 알바하던 동료들은 죄다 예수라는 사람과는 도무지 연결고리가 없는 인간들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무리들은 모두 사탄 마귀 새낀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사탄 마귀 새끼들과 직장생활을 어찌 해야될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닥쳐왔다. 정말 그들은 괴물이었는가?
그들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누구도 주 예수를 대적하는 사악한 사상과 악한 심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도리어 내가 알아 왔던 많은 크리스찬들보다 순수했으며 그들의 선악적 색채의 침투 비율은 크리스찬들의 평균과 일치했다.
내가 증오하고 정죄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술을 마셔보았다. 술이란 건 '대단히' 즐거운 창조물이었다. "왜 술이란 걸 마셔야만 진솔해 질 수가 있는 거야. 우리 크리스찬들은 술 없이도 오픈 마인드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고 이해할 수 있어." 그런 (술의 무익함에 대한) 나의 주장이 얼마나 궁색했는지 깨닫는 데는 임페리얼 1병으로 충분했다. 잘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학습된 경계심과 그 경계심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실을 가장한 되먹지 못한 논리가 그동안 나를 지배해왔음을 알았던 것이다.
오히려 '교회'라는 세련된 멍석 위에 견고하게 세워진 말들(Markers in a chess)인 우리네들이 주고받는 짜고치는 고스톱 내지는 흔해빠진 트렌디 드라마 대본읽기식 크리스찬 라이프는 (신에 대한) 눈치 없이 고만고만한 인간관계와 도덕과 약간의 일탈의 버무림 라이프 보다 몹시 불순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과 넌크리스찬들의 차이는 크리스찬이냐 넌크리스찬이냐의 차이 밖에 없는 셈이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나는 여지껏 20세기 초 미국과 중엽의 독일 우생학자들인양 고개를 빳빳히 해왔다.
추론이 아닌 연역에서 출발한 고집은 한층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법이다.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가장 논리적으로 가르쳐 줄 것처럼 뉘앙스를 풍기는 수많은 (뚜꺼운) 서적들이 몇 장 몇 절 말씀을 찾아 배껴쓰는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나마 함량미달의 극치는 '번역된 토익시험'을 연상케 한다.
<<아래 대화를 듣고 물음에 답하시오>>
여자 : 난 이 그림이 싫어.
남자 : 나도 그래.
<문제>
다음중 이 대화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은?
A) 그도 그 그림을 싫어한다.
B) 그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
C) 그는 도대체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D) 그는 뭘 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 신앙이 주로 학습에 의지하고 있고 그 학습이란 것도 심히 주입식에 가까워서 진정 참교육(하나님을 알고 느끼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극단적으로는, 우리가 가장 흔하게 고백하는 가장 심각한 결단인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말 한 마디를 하는 데에도 우리의 혀는 인격적 이성을 따라 발음하지 못하고 즉각적이며 조건반사적인 단문을 내뱉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마치 경상도 사람들과 전라도 사람들이 뭘 제대로 알아서 서로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학습된 묘한 배척감이 그네들을 몰아 붙임으로써 맹목적이고 단순한 지역감정의 일원에로의 가입을 독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크리스찬들은 학습(암기)된 교리문답을 세상에서 가장 신실한 신앙고백으로 착각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그래서 그 무지만큼 저 속된 세상 앞에 고고하리만치 당당하다.
*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 필립 얀시 저, 좋은 씨앗, 2000
## 넌, 리디, 홀스
내 눈빛을 두려워하는 큰 형은 나 또한 그와 같은 착각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8월초에 강릉에서 시작한 자전거 여행은 폭우를 뚫고 도착한 부산에 사는 큰 형이 픽업해가는 것으로 잘 마감되었다. 그날 밤, 배다른 동생과 술자리를 함께 하며 형은 이윽고 긴장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제 술도 잘 먹네." (우리 형은 넌크리스찬이다.)
"못 먹을 건 또 뭐 있겠어요."
"예전엔 안 그랬잖아. 한 여름에도 목에까지 단추를 채우고 한 손에 성경책 들고 '주~를 찬송하세...'하는 게 네 전형적인 이미지 아니었냐?"
"다 철없던 어린 시절 얘기죠."
"그렇게 말해주니 내가 좀 편하구나."
그러면서 형은 한 잔 들이킨다. 나이 스물 여섯이 되어서야 생각이 좀 정리가 된다는 내 말을 들은 형은 내 신앙의 균열을 염려해 주었다. 그건 아니라고, 그 동안 덮어두고 있던 문제들을 좀더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뿐이라고 이것저것 소소하게 내가 설명해주었다.
"기쁘다. 3년전에 내가 네게 똑같은 말을 했을 때 너는 날 무슨 마귀새끼쯤으로 단정짓더니만....."
"제가요?"
몇 순배 더 돌자, 신앙인이 아닌 형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에서부터 시작해 죄와 예수를 거쳐 오늘날의 목자들 그리고 그네들 손에 붙여진 수많은 양들에 대해 한 시간여를 쉴새없이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 (넌크리스찬의) 머리통에는 온갖 추악한 냄새나는 덩어리만 들어있으리라 믿고 있던 나에게, 한편으로, 아득히 어지러운 시간이기도 했다. 카프리로 시작해 윈저 그리고 국화주까지 떨어져 갈 무렵, 형은 감정이 격해져 눈을 붉히며 말했다.
"예수님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라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온 산과 골짜기를 헤매신다고 말씀하시는데, 너희 크리스찬들은 한 마리 양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떠나지 않으려 하니 그건 어찌된 일이냐?"
"........"
"그 양이 얼마나 못 낫고 어리석으면 저 혼자 길을 잃겠느냐만.........어쨌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목자시니 언젠가는......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잃은 어린 양을 찾아오시리라 믿는다.........."
거기까지.
그리고 둘 다 오줌이 마려운 건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형이 펴준 이부자리에 몸을 대충 던져놓고 천장을 보고 있노라니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3년전의 내가 큰 형을 마귀새끼쯤으로 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홀리 스탠다드 크리스찬들의 눈엔 마귀새끼가 비쳐져 있을까? 나는 아흔 아홉 마리 중의 하나인가 아니면 그 못나빠진 한 마리인가?
넌크리스찬들을 바라보는 (홀리 스탠다드 크리스찬 시절의) 나는 적개심에 불탔던 것 같다. 어짜피 마귀새낀데 무에가 사랑하고 인도하고 보살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주를 알지 못하는 불쌍한 무리들을 중보기도 때마다 가슴에 품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부닥쳐 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마주치는 실존적 넌크리스찬들을 전술한 무리들로부터 분리할 줄 아는 고도의 정교함이 나에게 있었나 보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가슴으로 감싸 안는 그들은, 그렇다면, 미라가 되버린 노먼 베이츠의 어머니쯤이나 될 게다. 나는 넌크리스찬을 감싸 안아야 할 리디(reedy:유약한) 크리스찬인가? 아니면 홀(리)스(탠다드)크리스찬들에게 교정 받아야 할 넌크리스찬인가?
방안에 가득한 솔잎 방향제 냄새를 맡으며 밤이 깊어갈수록 정신은 말똥말똥해져갔다.
(2002.10.9)
명 오늘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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