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방위대
지난 15일은 제321차 민방위의 날이었다. 도봉운전면허시험장에 가는 길에 싸이렌이 요란스레 울리고 차량들이 줄을 지어 멈춰 서있는 걸 보고 그제서야 민방위 훈련중임을 눈치챘다.
민방위 훈련에 관한 최근의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예전에 부산에서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싸이렌이 울리면 방송실에선 라디오를 생중계(?)해주고 우리 코흘리개들은 2인용 초록색 장책상 밑에 기어들어가서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생긴양 즐거워했던 게 살풋 떠오른다. (
에스키스도 아마 그때 추억 속에 있었으리라. 그녀는 내가 얼굴을 기억하는 몇 안되는 초등학교 동창 중 한 명이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민방위 훈련통제원들은 어지간히도 쫓아왔다. 생전에 그렇기 쫓기기도 처음이었다. 한 가지 안스러웠던 점은 그네들이 하나같이 환갑은 족히 넘었을 듯한 어르신들이었단 사실이다. 어떤 분들은 간파하셨겠지만 이런 경우에 으레 그런 분들의 신상명세를 보면 '무슨무슨 전우회', '무슨무슨 참전용사회' 따위 직함을 가지고 있다. 나라 생각하는 데 나이가 무슨 문제겠느냐마는, 어설픈 모자에 완장까지 셋팅하고 도로에 선 그분들은 싸구려 연극에 동원된 엑스트라처럼 보였다.
1975년 '민방위기본법'에 근거하여 창설된 민방위대는 시대가 만들어 낸 쓰레기임에 분명하다. 3, 4공화국의 절정기였던 당시 북한에 비해 백성을 종속할 수 있는 합법 조직이 터무니없이 부족함을 알게 된 극우론자들이 내놓은 세트메뉴가 민방위기본법이다. 여기에는 1988년 20세로 상향조정되기 전까지 17세만 되면(즉 고등학생이면) 민방위대에 편입되도록 하여 마치 북한의 교도대를 연상케 하거나, 2000년 연령 한도가 45세로 낮아지기 전까지는 노농적위대 보다도 더한(50세) 연령규정이 있었으며, 1993년이전에는 주민등록 전입신고와는 별도로 민방위대 전입신고를 하도록 하는 웃기지도 않는 일이 다재했다.
이렇듯 4반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민방위대이지만 그 존재 의의는 그렇게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민방위대가 있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마도 민방위 훈련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민방위대의 기본 기능은 '전쟁억제', '사전대비' 그리고 '재난대처' 이 세 가지다. 그런데 '사전대비'든 재난대처'든 그 말이 그 말이므로 결국 '전쟁억제'와 '재난대비'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굳이 세 가지로 만든 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습성 때문일 듯..... ) 우선 후자인 '재난대비'를 보자. 올 여름 태풍 루사를 위시한 엄청난 폭우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 그 재난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민방위대는 재난대비를 설립의의로 내건 - 군대 다음 가는 - 범국가적인 방대한 조직이므로 당연히 재난 구호의 핵이어야 당연한 논리일 것이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번 수해복구 및 원호활동의 최고 공로는 3000여개에 달하는 자원 봉사단체들과 연인원 33만여명에 이르는 자원 봉사자들에게 돌림이 마땅하다. 이들을 통합 관리하고 배치하는 정부주도기관이 없음으로 인해 상당한 수급의 혼선과 활동상의 애로가 발생했지만 말마따나 따로노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정도 했으면 굉장히 잘 한 거다.
그렇다면 그동안 민방위대는 무얼 했는가. 20세부터 45세의 왠만한 성인은 민방위대에 편입되므로 아무리 적게 잡는다 쳐도 수백만명이 수해현장으로 투입되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럼에도 민방위대 활동의 최일선이자 최후방은 동사무소 직원과 마을 이장님이 전부였다. 그러면 1년에 네 번이나 전국에 비상을 걸어놓고 십여분 동안 '얼음'을 건 다음, 소방차와 엠뷸런스가 뛰어다니고 지상연막통을 떠뜨리는 이 국가적인 훈련은 곧 전국 버라이어티 쇼에 불과하지 않을까?
'전쟁억제'라는 말은 '재난대비' 보다 공허하게 들린다. 육군에 5분대기조가 있다면 공군에는 1분대기조라는 것이 있다. 1분내에 출격을 하지 않으면 이미 상황은 종료가 된다는 뜻인데, 시민들이 공습경보를 듣고 차량을 멈추고 가까운 대피소로 신속히 이동할 수 있도록 평시 훈련을 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실제상황에서 시민들이 가장 먼저 접하는 건 경보싸이렌이 아니라 폭격기의 파열음과 폭탄 터지는 소리일 것이고 시민들을 가장 신속하게 대피시키는 것은 노란완장 아저씨가 아니라 불타는 건물과 검은 연기일 것이다. 교차로 앞 멈춰 선 차안에서 하품이나 쩍쩍하며 언제 끝나나 눈치만 보고 있는 이 훈련은 형식화되어 화석이 되어버렸다.
사단급 이상 합동 작계시행훈련에 참가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스토리라인을 정해놓고 엄청난 규모가 스멀스멀 움직여가는 건 결국 높다랗게 쌓아올린 참관인(보통 별 두세 개)에게 어느 정도의 여흥적 만족을 줄지는 몰라도 그 훈련이 목표로 하는 (당초 가능한지도 의심스럽거니와)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연말에 대대적 토목공사를 벌이는 구청의 공무원에서부터 시작해 돼먹지 못한 연중 구호와 표어를 내거는 중앙 각 처부의 고위 공무원에게까지 관통하는 민망함(가만있기 뭣한 민망함)와 일맥이다.
이 조직과 쇼를 유지하기 위한 인적/물적 소모는 어떠할까 생각해 보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순 반복 작업'을 이 민방위 훈련에서 발견했다. 가로등마다 꽂혀있는 민방위 깃발. 딱 하루 보기 위한(에혀~ 보는 사람이 있긴 하는 걸까....) 그 깃발은 전국적으로 활용되는 것이고 적어도 일년에 네 번은 공무원 또는 유사공무원들이 포터를 타고 다니며 그걸로 시내를 수놓아야 한다.(안타까운 건 그 깃발은 연중 그들이 꽂아야하는 수많은 깃발의 지극히 적은 일부라는 사실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각 깃발은 짧은 면에 세 가닥의 끈이 있어서 깃봉에 묶여있었다. 몇 번 사용하고 나면 비도 맞고 때도 타고...... 언젠가는 빨아야겠지........ 그걸 다 풀어서 세탁기로 돌리고 널어 말린 다음 다시 묶고...... 어지럽다. 내가 볼 수 있는 단편이 이 정도인데, 그 조직의 구성과 운영에 투입되는 돈다발의 막대함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 파시즘
1969년 미국 전역의 자원 봉사단체들이 모여 전국재난대책자원봉사단체협의회(NVOAD)를 결성하고 이 민간활동을 연방응급관리청(FEMA)이 재정적/행정적으로 지원하고 있을 때, 1975년 우리 나라에서는 '민방위대'라는 유령단체 조직하는 전근대성을 보였다. 이게 이 나라의 평균적인 정신수준이며 거기서 엿볼 수 있는 저변의 파시즘(일상의 파시즘이라고도 한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여러분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 지. 온국민이 반공에 미쳤던 80년대 초는 초등학교 아침조회도 반공궐기대회를 정례순서에 포함시키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차에 나온 '나는......'는 전국의 국도극장에 내걸렸고 각 학교 교장선생들은 의무관람을 권장(강요)하여 나 역시 구포역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서 반 아이들과 함께 그걸 본 기억이 난다. (영화가 끝난 후에 울다 거의 실신하다시피 해서 친구가 버스정류장까지 부축해주었었다.......-_-)
갑자기 그 얘길 왜 꺼내냐면 존재의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친구 중의 하나가 문득 나에게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너 혹시 이승복 나오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영화 봤냐?"
"70년대생 중에 그 영화 안 본 사람이 어딨겠어?"
"그런데 말야.... 그 영화를 장르로 분류한다면 어디에 속하는 줄 아니?"
"음........ 굳이 분류하자면........ 반공영화 아닌가?"
"그게 장르냐?"
"..........."
"그 영화는 말야.........내가 보기엔, '하드고어 스릴러'가 아닐까......."
뎅~
거참.....정신이 번뜩 드는 기분이었다. 맞는 말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하드고어 스릴러가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참고로, 하드고어 스릴러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한국영화가 '텔미썸씽'이다.) 내가 놀란 건 그게 그렇게 분류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걸 초등학생인 내가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니 그럼.....그게 전체관람가였단 말야?"
"그러고 보니 그러네...."
슬래셔 무비에서도 나오기 힘들 법한, 어린이 입을 칼로 난도질을 하고(무삭제), 워커로 목을 찍고, 갓난 아이를 들어 벽에다 패대기치는 영화를 전체관람가로 내 놓았다.........80년대에......... 70대 노부부의 사랑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가 등급외 판정을 받아 제한상영 조치된 것이 2002년 오늘의 정신세계다. 하물며 90년대도 아닌 80년대의 심의에서 초등학생에게 낭자한 피를 보게 하는 건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다...... '반공'이라는 두 글자 외에는......
그게 우리의 정신이다. 한 미국 장성이 '한국인들은 쥐떼의 근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우리는 분노했었지만, 그것이 미국인의 입에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입에서 나온 자조적 단어였다면 제법 설득력을 가졌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무언가에 미쳐 달려가는 쥐떼, 그게 우리의 정신이다.
## 그리고 교회
교회 안의 파시즘을 생각한다. 신앙이란 것이 다분한 맹목성을 전제하나 맹목성을 배제하고서도 설명될 수 있는 것이 건전한 신앙이다.(그리고 교회 역시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파시즘은 갈수록 교회 안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으며 이제는 압도적인 게 되어 버렸다.
은사라는 것이 RPG 게임에서 캐릭터가 레벨마다 습득하는 스킬은 아닐진대, '성령 받으면 방언한다'는 논리를 진리인양 설파하는 모양은 기괴하게 보인다. 김동호 목사마저 방언을 받았으면 상황은 더 나빠졌을 것이다. 수련회를 가면 큰 북을 '둥! 둥!' 울리며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것 하며, 만세 삼창으로 하나님의 가는 귀를 배려하는 것은 아직도 가슴을 무겁게 한다. 고난 속의 감사를 말하나 여전히 복 주시는 하나님, 채우시는 하나님을 선호하는 경향은 여전하다.
이렇듯 베드로가 한 큐에 오천 명을 보내버린 페이지를 잡고 있는 파시즘은 무리 속에서도 뽕나무 위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는 것같다. 물론 다들 하품을 하며 운전대를 잡고는 있지만 별반 나서지는 않는 분위기다. 거기에 길들여진 탓일까? (`02.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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