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때 국어를 가르쳤던 분이 박순영 선생님이신데, 그분의 수업은 고등학교 교사가 하는 것 같지 않고 마치 대학 강의와 같은 자유로움(그때 그걸 알았을리는 없으니 그냥 대충 느낌이 그랬단 말씀)이 느껴져 좋아했던 분이었다.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라 더더욱 그랬던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박 선생님의 국어 수업은 학생 한 명이 조사해온 고사성어를 발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매일 한 개씩, 그리고 다음 수업에는 그 전 수업까지 발표했던 고사성어를 누적해서 다함께 낭송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알고 있는 흔하지 않은 고사성어는 그때 익힌 것이 대부분이다. 참고로, 내가 발표했던 고사성어는 '미생지신(尾生之信)'.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내 짝 이종식이 발표한 고사성어 때문이다. 내 다음 차례였던 그는 '표맥(漂麥)'을 들고 왔다. 그의 뜻풀이에 의하면 '무언가에 매우 집중하는 모습'이라고. 다소 엉뚱한 학창생활을 하던 그 녀석 치고는 무난하게 넘어가는가 했더니, 박 선생님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게 왜 집중하는 모습인데?"
"네?"
"표맥. 떠다니는 보리라는 뜻이지?"
"네."
"떠다니는 보리 하고 집중하는 거 하고 무슨 관계냐 이 말이야. 유래도 모르면서 뜻만 외우는 건 아무 소용이 없잖냐."
(일반적으로) 누리그물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집에서 몰래 갖고 온 부모님의 모토롤라 삐삐가 경탄의 대상이 되던 시절) 종식이는 '표맥'의 유래를 쉽사리 알아 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선생님은 끝까지 그 유래를 알려주지 않으셨고 매 국어시간마다 뜻을 알아왔냐고 다그치셨다.
특히 기억남는 건, 발표한 고사성어가 전부 4자성어였는데 종식이의 '표맥'만 2자였기 때문에 '누적 다함께 낭송'을 할 때
".........
읍! 참! 마! 속!
미! 생! 지! 신!
표! 오! 매! 액!
........"
이런 식이었다. 으..... 그 때 정말 재밌었는데...... :)
하여튼, 마지막 국어 시간까지 종식이는 표맥의 뜻을 알아 오지 못했다. 박 선생님도 표맥의 뜻을 알려주시지 않았다. "언제고 직접 뜻을 알아내!" 하고 수업을 마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려 12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불현듯 '표맥'이 생각났던 것이다.
명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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