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30일 (월요일)
00:35
덜덜 떨면서 잠이 깼다. 지독하게 추웠다. 담요로 온몸을 둘둘 말아 보았지만, 이미 몸속까지 파고든 한기 때문에 조금도 따뜻하지 않았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도로쪽으로 돌아누웠다. 풀벌레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10분쯤 꼼짝않고 누워있었을까? 적막한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희미한 엔진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구불구불 거리며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산길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내가 누운 버스 정류장을 집어삼킬듯한 진동을 일으키며 쌩하니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또 다시 침묵.... 잠시 조용했던 풀벌레들은 다시 울어대기 시작했다. 하늘엔 별도 없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것도...
정말 외로웠다. 세상에서 나혼자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핸드폰을 집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명희누나였다. 짤막하게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보낸 사실만으로도 누군가 지금 내 기분을 이해해주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는데, 문자를 받은 명희누나는 곧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나직하게).... 어디야?"
"음...... 시골 어딘데, 정확히는 몰라요."
"......... 무섭지는 않고?"
"아무도 없어요.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인기척이라곤 없어요."
별 대단치도 않은 일상적인 몇 단어의 조합으로 듣는이를 압도하게 하는 사람을 여러분은 알고 있는지? 명희누나가 바로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짧은 통화였지만 잠시나마 외로움에 허우적 거렸던 날 구원해주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출발 준비를 했다.
01:00 라면을 하나 끓여먹고 다시 출발하다. 너무 추워서 이대로는 얼어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자전거를 달리면 온기가 돌테니까 나중에 날이 밝으면 낮잠을 좀 자는게 나을듯 싶었다.
01:20 생곡휴게소 통과. 규모가 그리 작은 건 아닐텐데 폐가처럼 쥐죽은듯 고요하다. 나만 남겨두고 세상 사람들이 전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생곡휴게소 이후 율전삼거리까지 올라가는 길은 정말 정말 정말 힘들었다. 확연한 오르막도 아닌 길이 끝이 안보이도록 계속되는데, 옆에 있던 개울물을 보면 분명 이쪽으로 흘러오는 것이, 은근한 오르막임에 틀림없었다. 작년에 자전거여행을 떠났을때 3일차 였던가.... 탈진상태가 되자 평지에서도 페달을 미는 것 자체가 심히 고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이 그랬다. 조금 타고 가다 조금 걷고 조금 타고 가다 조금 걷고........ 시래기 줄기처럼 자전거에 축 늘어져 있었다.
이윽고 '진짜' 오르막이 나왔다. 끝이 어딘지 짐작할 수 조차 없는 지그재그 오르막길............................... -_ㅜ 30분가량 적막만이 나와 함께 했는데, 멀리서 아련하게 자동차 한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포터. 경광등을 켜놓은 내 자전거를 발견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지나쳐 갔다. 100여미터 앞의 코너에서 왼쪽으로 꺽어 계속 달렸다. 깜깜한 어둠의 숲 속에서 환한 헤드라이트 빛이 꾸물거리며 그 산길을 올라가는 게 보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야되나 가늠이나 할 요량으로 자전거를 세우고 포터의 궤적을 좇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댓번 오락가락 하더니 크게 한 번 꺽었는지 불빛은 보이지 않고 엔진소리만 조그맣게 들렸다. 고개를 넘어갔나 싶어, 가만히 귀기울여 보니, 고개 저쪽으로 넘어가 뚝 끊기는 게 아니라 들릴락 말락 조금씩 멀어지는 소리였다. 아..... 아직 많이 남았구나....
02:10 율전삼거리 도착
31번국도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사진을 찍을 기운도 나지 않았다. 너무 힘들었다. (이후론 사진이 거의 없다...... 몸이 지치니 맘에 여유도 없더라...) 왼쪽으로 가면 인제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평창(진부면)으로 가게 된다. 이 56번 국도와 31번국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무척 묘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 지겨웠던 오르막길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구릉지였기 때문이다. 원뿔의 윗쪽 1/3을 잘드는 칼로 싹둑 잘라낸 다음 31번 국도를 깔아놓았다는 표현이 어울릴 거다. 아무튼 나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한 10여분 지극히 평탄한 길을 달렸는데 덜컥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고개를 넘으면 내려가야 할텐데 20분 넘게 달려도 계속 평지가 나오는 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으로 이 이해못할 고산 구릉지를 설렁설렁 달리고 있노라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으므로 조금 몽롱한 기분이랑 겹쳐서 제대로 된 내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따금 인적도 있어서, 집앞을 지나칠 때면 그 시골틱한 '컹컹'하는 개소리도 들리고 그 깊은 산속에 교회 십자가도 몇 개 볼 수 있었다. 도로 옆 개울을 줄곧 눈여겨 보았는데 내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징조가 틀림이 없구나 싶었다.....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고 그 아래에 버스정류장이 하나 서 있어 쉬어갈 요량으로 자전거를 세웠다. 긴의자가 있었지만, 맨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골이라 모기와 나방은 왜 그리 많은지..... 뜨거운 가로등에 필사적으로 달려들며 수백마리 날벌레들이 군무를 이루고 있었다. 꽤 큼직한 - 내 손바닥만한 - 나방 하나가 가로등에 스치더니 아스팔트 한 가운데로 툭 떨어져 꿈쩍도 않았다. 이 녀석... 꽤 아팠겠구나 싶었다.
02:30 드디어 눈치를 챘다.
기다리던 내리막길이 나온게 아니라 그...... 공포의 지그재그 오르막이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나중에 알았던 거지만,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율전삼거리는 계방산의 언저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절반 올라가고선 힘들어죽겠다고 헥헥 거린 셈이다. 아직 본편은 시작되 안됐는데.....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20~30번도 더 왔다갔다 한 것 같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달도 뜨지 않은 밤, 캄캄한 숲속에 다시 홀로 남겨지자, 귀신이란 녀석의 존재성에 대해서도 이따금 생각하게 되어 덜컥 덜컥 겁이 났다. 평소 늘 귀신과 대면해 보길 소망(?)해 왔었지만, 이 상황에 그 녀석이 나타난다면 무척 낭패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극도의 스트레스가 마음을 짓눌렀다.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드라마 같은데서 주인공들이 이렇게 소리지르고 나면 맘이 풀린다던데, 별루 그런거도 없네.... -_-;;; 뭐, 어찌됐든 내가 언제 이렇게 소리를 질러보나 싶어 계속해서 괴성을 질러댔다.
추위 때문에 잠이 깼을 정도로 기온이 낮았음에도 그 오르막을 올라가느라 온몸엔 땀이 비오듯 흘렀다. 입에서 김이 퍽퍽 뿜어져 나와 안경이 뿌옇게 변했다. 희미한 차선을 따라 한참을 기계적으로 걸어올라가는데... 숲속에서 무언가 희번덕거리는 게 보였다. 저게 뭐지?
반딧불!!!!
반딧불이었다. 밤하늘에 빨간 불을 깜빡거리며 유유히 날아가는 여객기처럼, 숲속 나무 사이사이를 그녀석들, 소리도 없이 깜빡깜빡 불을 밝히며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반딧불이를 본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가드레일에 걸터앉아 조용히 둘러보니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검은 빌로도 커튼에 큐빅을 수십개 박아넣은 것처럼 온통 꼬마전구가 켜졌다 꺼졌다 했다. 차가 한대 요란하게 지나가자 겁이 많은 이 녀석들은 5분 넘게 쥐죽은 듯이 있다가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귀여워~~~~ 이 장관을 카메라에 담아야 하는데..... 노출을 최대로 해서 열댓장을 찍었지만 나온게 하나도 없다. -_ㅠ
05:00 해뜨기 전 2시간 동안의 기억은 잊어버리고 싶다.
내가 걸어 올라간게 아니라 저혼자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신발위에 내몸이 얹혀 있던듯 싶다. 200여미터 올라가서 왼쪽으로 꺽고, 200여미터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꺽고,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도록 그것만 반복했다. 어느새 반딧불이도 잠자러 다 가버렸다. 언제 정상이 나올지 이젠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으므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 조림사업용으로 내놓은 비포장 임시도로로 빠지는 길목에서 돗자리를 깔고 물을 끓였다. 잠을 못자서 그런지 입맛이 없다....
06:00 운두령 정상 도착. 엉엉엉엉엉엉........ㅠ_ㅠ
정상에 올라 가장 먼저 튀어나온 한 마디가 욕이었다. 그만큼 힘들었다. 이건 정말이다. 그마만큼 힘들었다. 휴우....... 안개가 자욱한 운두령 정상에서 또다시 철푸덕 주저앉아 울먹울먹 하고 있었다. 산이 높은게 누구 탓할 건 아니지만 때문에 아무에게도 화풀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더욱 날 서럽게 만들었다. 잠시후 정신을 수습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화물트럭 한대가 멈춰서있고 기사 양반이 날 불쌍하단 눈으로 쳐다보고 있길래 아무렇지 않은척 바지를 털고 일어났다.
이젠 내리막길이었다. 밤새도록 올라온 만큼 내리막길이 펼쳐질 것이다. 언뜻 봐도 고개 너머가 탁트여 있어 이제 오대산까지는 문제없어 보였다. 더워서 걷어올린 소매를 다시 내리고 단추를 잠궜다. 안개 때문에 시계가 불량했으므로 완연한 아침이었음에도 후미 경광등을 켰다. 그리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었던가? 산을 오르니라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여 소모한 운동에너지는 1089미터, 순도 100%의 위치에너지로 저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 왕복 3차로 국도를 신나게 내려갔다. 그 기분 이루 말할 수 있으랴....
30분쯤 계속 내려가자, 차가운 아침바람 때문에 온몸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어버렸다. 햇살이 눈부시게 비쳤지만, 싸늘한 지면을 데우기엔 아직 부족했다. 내려가는 길 옆으로 꽤 넓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세수를 했다. 씻는 김에 머리까지 감았는데.... 으..... 해골이 빠개지듯이 아팠다. 차가워서....
6시부터 8시까지의 아침이란게 참 애매한 시간이다. 뭔가 새롭고 활발한 것 같으면서도 실지로는 정말 하루의 시작이라 느끼기엔 지나치게 설익은 듯한 느낌....
06:50 속사삼거리 도착
내가 선 이곳이 해발 700 미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가파른 길을 바람때문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달려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300미터를 내려왔다는 말이 되네. 가속력이 무섭긴 무섭군.... 그리고 올라가는 것도.
영동고속도로를 만났다. 강릉엘 갈때 타게 되는 고속도로.... 자동차로 저길 달리면 4시간 안에 도착하는 곳이 강릉인데,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나 싶었다. 속사삼거리부턴 6번 국도인데 또 오르막이다. 내리막길을 달리는 동안 힘이 좀 축적되었나 싶었는데, 웬걸, 만만해 보이는 오르막도 50여 미터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지금 내가 지치긴 많이 지쳤나 보다.
07:45 진부면내 도착
Flame 님의 자전거여행기에서 등장했던 그 '진부'다.
::: 참고 :
http://www.lemoned.co.kr/vt/22.htm
진부면내로 들어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수면부족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밤새워 공부한 다음날, 이유없이 나른하고 무기력해지며 만사가 귀찮아졌던 것처럼, 진부면 풍경이 모조리 뿌연 세피아톤으로 보이면서 아련한 꿈 속을 헤매는 듯했다. 한 마디로 딱 누워자고 싶었다. 풀숲이 무성한 강변으로 긴의자가 많이 있었지만, 쓰레기 나부랭이가 너무 많아 지저분해서 도저히 눕고 싶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도 깔끔을 떠는..... -_-;;;) 그때 날 한창 맥 빠지게 했던 건 카메라 때문이었다. 그동안 비가 오거나 우중충 한 날들이어서 카메라를 눈여겨 볼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모처럼 아침햇살을 받아며 카메라를 살펴보니 기절초풍할 만큼 많은 기스가 나있는 것이었다. 전자제품 아끼기를 황금과 같이 하는(?) 나로선 피눈물이 흐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벌어진 일이고 누구 하나 탓할 건덕지도 없는데...... 그저 근거없는 피해의식만 가중되며 수면부족 증상은 그 수위를 더해갔다.
생각에 잠겼다. 인제 오대산을 넘어야 되는구나...... 오대산.....
갑자기 왈칵 짜증이 났다. 계방산을 넘었는데 왜 쓸데없이 여기까지 내려왔다가 또 고개를 넘어야 된단 말인가. 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구! 어젯밤에 고생을 너무 징하게 한 터라 같은 걸 다시 한 번 해야 한다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한 번 했던걸 도로 물르고 다시 하는 기분...... 쒯이다. (여러분은 안그런가?) 말마따나 내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에이미가 태운 원고를 다시 써야하는 조우의 기분은 그야말로 쒯 오브 쒯 인것이다. 오대산... 오대산........
내가 넘어야할 고개는 오대산의 진부령이었는데, 거기에는 이미 일면식이 있었다. 작년 10월 말 이었던가.
덩열군이 별안간 함께 1박2일 오대산 산행을 제안했다. 내 사랑
덩열군과 함께라면 어딘들 못가리오. 아침일찍 강릉쪽 깃점(소금강)에서 출발해 산꼭대기인 진부령 즈음에서 진부령산장에 들어 하룻밤 자고 다음날은 반대편으로 내려올 계획이었다. 문제는 오대산 노인봉을 지나 우리가 묵을 진부령 산장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하던 저녁 무렵에 터졌다. 이정표를 따라 걷다보니 국도가 나온 거였다. 그리고 휴게소가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진부령 휴게소'.
산행 중에 별안간 국도가 나오면 정말 어이가 없다.
덩열군과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 하다가 휴게소에 들어가 직원에게 물었다.
"진부령 산장이 어느쪽이죠?"
"여긴데요.... 몇년전에 없어졌어요."
있지도 않은 산장을 찾아 오대산을 올랐던......추억(?)인데..... 아무튼 그때 보았던 진부령 휴게소가 진부령 정상에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맨몸으로 하루 꼬박 걸려 올라갔던 거기를 지금 자전거를 타고 올라야 하다 생각하니 어찌 아니 막막하랴....
08:10
숙제를 다 했든 못했든 학교는 가야하듯이 (적절한 비유인지...-_-;;;) 일단은 오대산을 향해 출발했다. 내 안에는 오직 한 단어만이 메아리 치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도암면에 도착했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6번국도의 연장이자 오대산으로 진입하는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착잡한 마음에 거의 울상이 되어가지고 왼쪽을 바라보니 안개인지 구름인지 희뿌연 연막 속에 엄청난 높이의 오대산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ㅠ_ㅠ 아..... 우째 해야한단 말인가.....
그러던 중에 고개를 들었더니 도로표지판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6번국도 [오대산]
↑445번 지방도 [강릉]
어랏...... 강릉? 이건 또 뭐야, 하고 지도를 보니 변변하게 길도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은 445번 지방도였다. (지도상으론 도로명도 확인이 안됐다.--;;;) 이쪽으로 가도 강릉이란 말인가? 잠시 지도를 들고 고민을 했는데....... 보시는 바와 같이,
느낌상으로 오대산 코스보다 훨씬 강릉에서 가깝고 또 오대산
국립공원 보다야 덜 험할 것 같아 보였다. 그냥 느낌상으로 말이다. -_-
그래. 이걸로 하자.....
그리하여 이 여행 최악의 선택인 445번 지방도로의 진입이 시작된 것이었다.
08:40
사실은 단박에 알아차렸어야 했다. 일단 갓길이 없었다. 국도에는 최소한 1미터 정도의 갓길 여유가 있어서 안전에는 그리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었는데 이건 도대체가 갓길도 없고 심지어 차로 바깥쪽을 표시하는 흰선마저 거의 지워져 있었다. 그뿐인가. 이 일대에 화물운송조합 총연합회 센터라도 있는 모양으로 온갖 종류의 대형트럭들이 질주를 해대는데, 내가 목숨이 한 다스였다 하더라도 그 도로를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게다가 안개는 걷히고 하늘은 구름 한 점없이 맑지.... 태양은 작열하기 시작하고 아스팔트는 후끈 달아오를 기세였다.
09:00
이젠 모르겠다.
나 자신을 어떻게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뭐 이젠 어떻게 하겠다도 아니고 그냥 꼼짝도 하기 싫었다. 만약 누군가 한 발짝이라도 날 떼밀었다면 그녀석의 주탱이를 날렸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버스정류장이 눈에 띄자 마자 주저없이 그리로 들어가서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11:20
이 넘의 도로가 무슨 산업도로라도 된단 말인가? 트럭들이 하도 시끄럽게 지나다니길래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버스정류장이 좁다보니 내 다리는 바깥으로 삐져나가 있어서 뜨거운 태양 아래 사정없이 익고 있었다. 한 20여분간 멍~한 상태로 앉아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정신없는 채로 한 20여분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길로는 도저히 못가겠다는 판단이 굳어갔다. 그러면 역시 오대산을 넘어야 한단 결론인가. 그건 정말 죽어도 못할 것 같은데...... 계방산의 악몽이 채 가시지 않았으니..... 그냥 트럭 한 대 히치해서 진부령 정상까지만 태워달라고 할까 골백번도 더 생각했다. 하지만, 차를 타고 갈거라면 결국 이 강원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온 고생 자체가 무의미 해진다는 게 문제였다. 힘들어서 차를 탄다면 애초에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을 자전거로 온 이유가 뭐란 말이냐.......
다른 길은 없었다. 6번국도로 돌아가는 방법외엔......
12:00
08:40분으로 돌아갔다.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내가 너무 침울해 있었기 때문에 도암면 삼거리에 있는 슈퍼에서 여행 출발이후 처음으로 콜라를 사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거 마시고 힘내...-_-' 그리고 그 맛있는 천하장사도 두 개나 사서 먹었다.
명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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