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니를 뽑은 날 본
사랑니
였습니다. ^^
별점은 네 개 반으로 <효자동 이발사>와 함께 제가 본 한국 영화 중 가장 높은 점수입니다. 하지만 모든 분에게 똑같이 적용되리라곤 생각치 않습니다. 오늘 제가 볼 때만 해도 상영 도중에 여럿 나갔거든요. 끝나고서도 '이게 뭐야~' 하는 푸념 섞인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대박 스포일러 하나 알려 드릴까요?
이 영화는 '반전 영화'입니다. 혹시 이 영화를 보실 요량으로 폼 잡고 계신 분들은 일체의 관련 정보로부터 몸을 사릴 것을 당부드립니다. 이 반전은 너무나 천연덕스럽고 교묘하여 아마 **X와 *명*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무도 눈치를 못 챌 겁니다. 저도 그 장면에서야 눈치를 챘습니다. 아마도 전혀 예상치 않았기에 더욱 신선하고 돋보였던 반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또다른 이유는 영화 안에 가득한 영화적 기교 혹은 미학적 요소 때문이었습니다. 단적인 예가 역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석'의 대사와 동시에 차밖으로 카메라가 넘겨지는 장면, 그리고 또 역시 카페에서 카메라를 밖으로 넘기는 장면이죠.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독의 시도가 여기저기서 눈에 띕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 영화가 갖는 또다른 미덕은 '풍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종류의 필체를 두루 섭렵한 나머지 그가 한 번 글씨를 썼다 하면 온갖 명필들의 기교가 넘쳐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네 명'의 저녁식사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아, 이 영화 정말 사람 흐뭇하게 만드는 뭐가 있습니다. ^-^
이 영화를 보면서 <극장전>과 <싱글즈>와 <4월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인물의 심리 묘사와 변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극장전>을 닮아 있지만, <극장전>에 한가득 담긴 냉소를 걷어내고 나면 <싱글즈>가 떠오르고, <싱글즈>의 유치함과 조악함을 뺀 다음 감수성을 더 집어넣고 나니 <4월 이야기>가 되어 있습디다. 한국의 이와이 순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사람이에요, 정지우 감독은. 아니, 어떤 의미에서 더 나을 수도 있고요.
그렇다고 전혀 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별 반 개를 까먹은 대목이 있어요. 한정식집에서 '석'의 대사 장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새나라의 어린이가 됩시다" 하고 외치는 것마냥 너무 노골적으로 설명조의 대사를 읊길래 유치해 보였습니다. 잘 나가다가 감독이 요 대목에서 좀 졸았나 했습니다.
덧붙이자면, 배우 김정은 씨에 대한 평가는 이 영화를 깃점으로 해서 많이 달라지지 싶습니다. 김정은 씨는 '룰루공주' 같은 시시한 드라마 나부랭이를 찍으면 안되는 거였어요. 스노캣은 '스칼렛 요한슨'을 가리켜 '어떤 종류의 무심함'이 느껴지는 배우라고 말했는데, 저는 이 영화 속의 김정은 씨에게서 그것과는 또다른 종류의 '무심함'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공은 있는데 좋은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없는 걸까요? 앞으로 그녀가 선택할 영화는 어떤 것인지 지켜볼 일입니다.
암튼 <사랑니>는 저랑 코드가 맞으시는 분들이라면 정말 후회하지 않을 명작이 될 겁니다. 이런 영화가 떠야되는데 말예요....... <극장전>이 쫄딱 망한 우리 나라 현실에서 너무 큰 기대일까요?
덧.
어린 인영 역을 요즘 '대장금2' 캐스팅 설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정유미 씨가 맡았는데, '어린 것이 잔망스러'울만치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덧2.
네이버 영화평을 둘러보니 최악이군요. 역시 흥행은 힘들겠습니다. 그래도 저에겐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
감상 포인트 하나 더 알려드릴게요. 30대의 인영(김정은)을 담은 화면은 하나 같이 안정된 구도에 느림 페이드인 페이드아웃입니다. 하지만 10대의 어린 인영의 모습은 일관되게 현기증이 날 정도의 심한 핸드헬드예요. 좋은 한 철 다 보낸 30대의 자박자박한 시선과, 5분만에 사랑하는 이가 바뀌어버릴만큼 격변하는 10대의 시선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고장난 엘리베이터에서 '석'은 재미로 그 아래를 내려다보지만 인영은 그를 끄집어 당기는 씬 등과도 연결이 됩니다. 아, 정말 대단한 영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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