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피터슨 감독의 1991년작 <Shattered>는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사내의 이야기를 다룬, 아주 잘 만든 스릴러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외화를 국내에 수입을 하면서 업자들이 아주 어이없는 짓을 하고 맙니다. 제목을 <
가면의 정사
>라고 번역해 버린 거예요. '정사'라는 단어의 자극성을 염두에 둔 것 같은데, 글쎄요.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목에서 싼 티가 줄줄 흐른다'가 제 느낌입니다. 매주 한 번은 극장을 찾는 지금 이 영화가 극장에 걸리더라도 절대로 보지 않을 것 같거든요.
이렇게 업자들이 딴에는 흥행을 노리고 영화 홍보 작업에 '변주'를 넣게 되는데, 요즘은 포스터를 통해 그런 경향을 많이 봅니다. 가장 가까운 예가 <11:14>입니다. 영화 자체도 별 볼 일 없었지만, 몇 장면 등장하지도 않는 힐러리 스웽크를 오직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후광을 노리고 포스터에 꽉 채워 담어주는 센스를 봤을 때, '아, 이 업자들이 정말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안 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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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과 가운데가 외국 포스터이고 오른쪽이 우리 나라 공식 포스터입니다. 아주 단독 주연이나 되는 것처럼 힐러리 이름만 한 개 크게 박아 놓은 것 좀 보세요. 영화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다면 저 외국 포스터가 제대롭니다. 나아가 영화의 오프닝 컨셉과도 맞닿아 있다는 것, 느끼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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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개봉은 안 했지만, 시사회를 다녀온
누리꾼 한 분이 <오픈 워터> 포스터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도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관련 누리에 들러보면 이 영화를 거의 '죠스 속편'쯤이나 되는 것처럼 마구 광고하고 있습니다. 심히 우려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그렇습니다. <인 굿 컴퍼니>의 한국판 포스터는 정말 엉터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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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이 미국 현지의 포스터이고, 가운데와 오른쪽이 한국판 포스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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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있는 한국판 포스터를 보세요. 가운데 포스터는 마치 스칼렛 요한슨이 단독 주연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만을 크게 박아 놨습니다. 아예 다른 사람 사진은 넣지도 않았죠. 오른쪽은 토퍼 그레이스와 스칼렛 요한슨의 사진을 대칭시켜 둘 사이의 러브러브 모드를 암시합니다. 친절하게도 '나에겐 애인 아빠에겐 보스... 이 남자 연애하고 싶다. 아빠만 아니라면...'이라는 멘트까지 넣어주는군요.
이 두 포스터를 본 사람은 다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 스칼렛 요한슨의 아빠가 다니는 회사에 고위직 임원이 낙하산으로 내려왔는데 새파랗게 젊은 총각이구나. 그런데 스칼렛이 이 총각과 사랑에 빠지는구나. 아빠의 입장과 자신의 사랑 감정 사이에서 좌충우돌 하게 될 스칼렛의 명랑 쾌활한 모습이 그려지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 내용을 기대하며 영화관에 들어섰습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요. 이 영화는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과거 연공서열에 의해 줄줄이 비엔나식으로 자리 보전이 되던 시절은 빠이빠이 하고, 오직 능력에 따라 해고 당하기도 하고 새파란 상사를 맞아들이기도 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거대 기업들은 그때그때의 계산에 따라 합병을 하기도 하고 분리 매각을 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와중에 팔팔한 도전자들을 방어해내기엔 힘이 달리고, 그렇다고 해서 훌훌 털어내버리고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늙어버린 암담한 우리들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들이 지고 있는 짐과 샌드위치 같은 처지를 가벼운 붓터치로 그린 영화가 <인 굿 컴퍼니>입니다. 뭐랄까...... '시의적인 영화'인 셈이죠.
이와 같은 시의적 영화는 많은 전례가 있습니다. 국내 영화 중에는 대표적으로 <접속> 같은 영화가 있겠죠. 당시 사회의 새로운 문화가 되기 시작한 '피씨통신'이라는 것을 주요한 영화적 설정인 동시에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는 도구로 삼습니다. 근래 만들어진 외국 영화 중에서는 <셀룰러>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핸드폰이 젊은 이들의 일상에 빠질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은 이 사회 변화를 주요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 여기부터 대강의 줄거리와 결말이 언급됩니다.
때문에 <인 굿 컴퍼니>의 주인공은 당연히 댄 포먼(데니스 퀘이드)입니다. 학비가 비싼 사립대학에 진학하겠다는 큰 딸과 이제 곧 돈이 왕창 깨질 예정인 작은 딸, 그리고 이후로도 10년 이상은 고정된 연봉이 있어야 할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늦둥이까지... 댄은 자기 딸이 자신의 상사를 사귀고 있다는 '사소한 문제'에는 눈 돌릴 여유가 없을 정도로, 직장에서 짤리면 안 된다는 절박함에 처해 있습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받지 않아 왔을 만큼 사람 좋은 사람이었던 그가 '자네는 변했어'라는 독기 어린 원망을 들을 정도로 현실적이고도 자괴감 섞인 고민을 해야 하는 모습이 영화의 주된 화두입니다.
굳이 주연의 영역을 넓히자면 댄과 카터 듀리아(토퍼 그레이스) 두 사람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위의 미국 현지 포스터처럼 말입니다. 카터의 성공욕은 자신의 부모로 인한 '애정 결핍' 때문에 발생한 보상 심리입니다. '사랑 받고 싶다'는 욕구가 '무시 당하지 않겠다' 나아가 '아무도 우습게 보지 못할 지위와 돈을 얻겠다'라는 강한 의욕을 불러 온 것이죠.
하지만 그에겐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일에 대한 애정이 없기 때문에 업무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며, 그저 그 업무에 대한 방법론만 익힐 뿐입니다. 제가 예전에 '브이제이 특공대'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대학 축제 같은 행사에 사회자로 일하는 사람이 자세하게 나왔습니다. 놀랐던 것은 그가 김제동 씨의 사부이며, 실제 그의 인터뷰나 사회자 활동 하는 모습이 김제동 씨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김제동 씨가 자신의 사부의 스타일을 똑같이 따라해 인기를 얻었던(그리고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김제동 씨에 대한 막연한 신비감과 존경심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인 굿 컴퍼니>에 비슷한 장면이 등장하더군요. 초반 카터가 '시너지'에 대한 일장연설을 하며 멋진 배경음악을 깔아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그가 일을 사랑하며 그 자리에 오를만한 감각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가 추종해 마지 않던 회장님이 등장하고, 회장님이 연설을 시작하는데, 어랏.... 카터가 했던 말과 똑같은 대사에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동작을 취하는 거예요. 그때 알았죠. 카터는 부모님한테 칭찬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가련한 모범생에 불과했구나 하는 걸요.
여기서 위태로운 인생의 황혼에 선 댄과 대척점에 서는 카터의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젊었던 그는 무한한 가능성의 이면에 왜 일해야 하는지,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정체성과 확신이 없었던 겁니다.
이상의 이야기들에 비해 알렉스(스칼렛 요한슨)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저는 알렉스의 사랑 이야기를 포스터에 전면 부각시키는 것을 '완전한 착각'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포스터대로라면 '로맨틱 코메디'여야 하는데, 카터와 알렉스의 연애질이 너무 심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알렉스는 카터를 좋아한 게 아니었다'고요. 망가진 포르쉐를 끌고 휘적휘적 사라지는 카터의 모습을 창가에서 훔쳐보는 알렉스의 마음은 어느 정도 호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겁니다. 당시 알렉스의 모든 관심사는 뉴욕대에 편입할 수 있느냐 없느냐 였거든요. 집안 형편상 아빠가 쉽사리 동의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모든 신경은 대학과 돈문제로 집중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곧 그녀는 깨닫게 됩니다. 아빠가 학비 조달할 걱정하지 않고, 또 곧 태어날 자신의 동생이 근심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아빠가 계속 회사에 다녀야만 한다는 걸요. 그녀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넵. 카터의 여자친구가 되어주는 겁니다.
이미 카터가 자신에게 푹 빠져 있다는 건 눈치를 깐 상태였습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밥이나 같이 먹어주며 이따금 잠자리를 함께 하는 사이로 계속 된다면 당장 아빠가 잘릴 염려는 없을테니까요. 나중에 정말 정이 들면 어떡하냐구요? 나쁠 것 없잖아요. 능력있겠다 서로 사랑까지 한다면야... :)
둘의 어처구니 없는 첫 만남과 첫 데이트를 보세요. 그 카페에서 카터가 알렉스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어디서든 결국엔 그는 알렉스를 발견하게 되었을 겁니다. 예기치 않은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침실은 또 뭐죠? 어쩜 배경음악까지 딱 맞춰 준비되어 있을까요. 모든 게 알렉스의 계획대로 된 겁니다.
차 안에서 목걸이를 받자 알렉스는 처음에는 당황하고 그 다음에는 억지로 기뻐하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왜 당황했을까요? 저는 카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숨기고 있는 감정에 대한 미안함이죠. 또 있어요. 댄은 두 사람의 뒤를 밟아 레스토랑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 봅니다. 그때 알렉스와 카터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단연코 사랑에 빠진 여인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댄이 카터에게 주먹을 날린 후 알렉스와 말다툼을 하게 되는데 그가 좀 심한 말을 하자 알렉스는 "그건 너무 심한 말씀이에요."라고 서운해합니다. 자랑스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래도 딴에는 아빠 짤리지 말라고 하는 연극인데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니 너무 서운하다....는 뉘앙스로 들리더군요.
또 있습니다. 병원에서 알렉스가 아빠에게 "내가 역겹죠?"라고 말하는데, 다 큰 딸이 남자를 사귀고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결코 '역겨운' 짓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딴 계산을 가지고 한 남자를 좋아하는 양 연기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조 섞인 표현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카터와 헤어지는 알렉스의 결정도, 아빠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자신의 학업 유지를 위한 욕심이 앞섰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빠와의 신뢰 회복을 위한 것이 되겠죠.
그런 연후에는 비로소 왜 이 영화가 카터와 알렉스의 재결합으로 끝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따지고 보면 카터는 알렉스를 진정으로 좋아한 게 아니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의 마주침에서 그가 알렉스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초대받은 저녁 식사에서 딱 한 번 교감이 이뤄진 것도, 사실은 생존 경쟁 속에서 늘 혼자였던 그가 누군가로부터 '당신 편이야'라는 따뜻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죠.
어쨌든 약간씩 상투적인 설정이 드러나 보이기도 하고, 또 댄의 화두가 본질적으로 해부된 것은 아니란 점에서 한계를 갖기도 하지만, 무난한 수준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포스터가 엉터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인 굿 컴퍼니>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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