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도 더 된 것처럼 빛이 바래버린 기억 속의 2년 전에는 나에게도 기도제목을 물어보아 줄 비슷한 나이의 교회의 친구들이 있었고, 여름 휴가철이면 몇 박 며칠로 그들 신앙의 벗과 함께 떠날 수 있는 수련회 모임이 있었다. 이것은 공식적인 모임을 통해 겪게 되는 신앙 체험과는 무관하였으나 다른 어떤 영적인 체험보다 뚜렷하고 깊은 골을 새겨 놓은 여름의 기억에 대한 개인적인 간증문(干證文)이다.
수련장에서의 마지막 금요일 밤 모든 공식행사가 끝났을 그날 무렵 시간은 새벽 한시가 넘어있었다. 극성스레 달려드는 섬 모기를 쫓아가며 같은 나이의 벗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끊어지는 게 안타까웠던 것은 아마도 다시는 이런 이야기를 하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마음이 내 생각과 무관하게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새벽 네 시까지 무던히 깨어 있다가 높다란 예배당의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감는 동안 시간은 조심스런 술래처럼 눈치 채이지 않게 지나가버려 눈을 떴을 때는 행사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계획에 정해 두었던 아침 여섯 시가 정확히 되어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확인한 어둠이 걷힌 하늘에는 비를 뿌리는 균질한 회색의 빛 덩어리가 잘 풀린 물감처럼 시야(視野)의 모든 곳을 메우고 있었다.
배낭에서 쿨 맥스(Cool Max) 태그가 달린 숏 팬츠를 마치 뇌관(雷管)이 달린 폭탄을 펼치듯이 조심스레 꺼내 입는데 티셔츠와 부딪히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물처럼 성긴 앞창이 발등을 덮는 에어 솔(Air-sole) 운동화를 발에 꼭 맞게 여러 번 단단히 조이고 붉은 벽돌로 된 예배당 유리문을 밀자 스트레칭을 할 틈도 없이 분무기로 곱게 뿜어낸 것 같은 빗 덩어리가 몸 구석구석에 배어들었다. 스톱워치를 점검하고 스트레칭을 끝낸 뒤 팔등을 훑어내자 손바닥에 촉촉한 물기가 벌써 흥건했다.
수양관 이름이 새겨진 바윗돌을 돌아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정말로 달려야 할 도로가 인도도 없이 조그맣게, 그러나 끝도 없이 눈앞에, 그리고 발아래 이어져 있었다. 시계반대방향으로 완만하게 꺾이는 내리막길의 흐름을 타고 왼쪽으로 내리 달리기 시작한다. 길도 모르면서, 아니 길을 모르기 때문에, 시멘트로 험하게 다져진 샛길을 무시하고 포장도로만 내내 달리는데,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가 후둑후둑으로 변하더니 달리기 시작한지 10분이 채 안되어 급기야 양동이로 퍼붓듯이 시야를 가리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강화도(江華島)라는 거대한 스타디움의 둥그스름한 곁을 맴을 도는 일을 신(神)으로부터 부여받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저 묵묵히 여기가 어디쯤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풍경이 아플 정도로 살갗을 치는 빗줄기 틈새로 뜬 눈 사이를 겨우 비집고 들어오는 것으로 사위(四圍)를 가늠하며 완만하게 자꾸만 왼쪽으로 치우치는 도로를 이어달려 나아갔다. 오른손으로 스톱워치를 꼬옥 쥐고 왼손을 자동차 와이퍼처럼 몇 초마다 한번씩 얼굴을 쓸어내리는 자세로 목적도, 기약도 없이 마침내 하염없이 달리는 일이 계속되었다.
이따금 추월하는 자동차 몇 대가 경적소리도, 엔진음도 모두 빗소리에 가려져 그렇게 고요히, 앞지르는 뒷모습만으로 뒤늦게 과장된 느낌을 만들어 나를 흠칫거리게 하며 도로 위 빗줄기 너머로 사라졌다.
운동화는 꼭 조였지만 어느새 빗물에 흠뻑 젖어 무거워지고 다행히 발과 어긋나게 미끄러지지는 않았지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영을 하게 되면 물 속을 가르는 도중에도 몸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느낄 수 있다던데, 이미 흠뻑 젖은 셔츠를 타고 핏물처럼 뜨거운 땀과 등줄기를 두들기는 찬 빗방울이 느껴졌다.
그렇게 온몸이 빈틈없이 젖은 채로 시간도 잊은 채 내처 달리다가 사람이 살지 않는지 빈 속내를 덩그러니 드러낸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야트막한 집 한 채를 보고, 비로소 생각을 정해 길을 돌이켰다. 낯선 길 위에 놓인 인적이 끊긴 빈 집은 달리는 사람을 돌이킬 만큼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길을 돌이켜 그대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라는 식으로.
어디로 가는가에 골몰해 지나치던 주위가 돌아오는 길에서는 눈에 비로소 들어왔다. 왼쪽에는 해안과 썰물로 바닷물이 빠져나가 드러난 갯벌로 이루어진 커다란 공간이 누워 있고, 오른쪽에는 완만하게 올라가는 경사와 초록의 수풀과 작은 집들이 보였다. 그리고 가끔가다 보이는, 참으로 생경한 무슨무슨 재선거를 알리는 포스터들. 그리고 이정표(里程標)처럼 이따금씩 서 있는 벽돌로 지은 조그만 버스 정류장들.
퍼붓는 비는 이미 오래였지만, 주위는 이상하리만치 한없이 적막했다. 정말 고요하구나, 그러자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지고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드러난 살갗 위를 미끄러지는 비도, 옷 속을 흐르는 땀도, 훅훅 내끼치는 숨결도. 아, 따뜻하다.
그리고 비로소 편하게 열린 눈으로 바라보는
막힘도, 끝도 보이지 않는
빗물에 젖은 바다의 검은 바닥과
초록의 부드러운 경사를 지닌 산등성이가
하염없이
길처럼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척 따뜻한 눈물이, 얼굴을 가리는 살갗 어딘가 에서부터 스며 나왔다.
미국에서 NBC 네트웍을 통해 방영중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는 TV 드라마 시리즈 “ER”을 보면, 시카고의 한 카운티 하스피탈(County Hospital) 응급실에서의 여러 에피소드 중에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온 한 백인 거지를 커다란 덩치의 흑인 의사인 닥터 벤튼(Dr. Benton)이 응급처치를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걸인(乞人)은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는데, 벤튼의 치료도중 시신경(視神經)에 변화가 오게 되어 기적적으로 시력이 회복되어 앞을 볼 수 있게 된다. 응급실은 뜻밖의 이 기적에 난리가 나고, 그러던 도중 혼잡한 응급실에서 그 걸인이 갑자기 사라진다.
사라진 응급환자를 찾느라 사람들이 벌집을 쑤신 듯한데 두 시간쯤 후에 제 발로 그 걸인은 자기가 누웠던 병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도대체 어딜 갔다가 오느냐는 의사들의 채근에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평생에 처음으로 눈을 떴는데, 도저히 이 응급실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노라고. 그 걸인은 자기가 평생 구걸을 하던 호수를 끼고 있는 공원으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거기서 보았노라고. 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주위의 나무들을. 호수 면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그리고 그것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앞을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에겐 너무나 평범해 기억조차 못하는 그 호수공원의 모습들에 그 걸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리고 잠시 후, 마법이 풀리듯이, 잠시 돌아온 그 걸인의 시신경은 다시 닫혀버리고, 응급실에 실려 오던 처음처럼 그는 앞 못 보는 거지로 남겨진다. 그리고 그날 치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후에, 그날 빗속에서 섬의 한 가장자리를 달리던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기어이 그 TV 시리즈의 에피소드를 함께 떠올린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묻는다.
그 오래전에
내가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라고.
참고 서지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Mind-Body Professional
http://www.mindbodypro.com/learningcenter/runners-high.htm
|
명 오늘 
명
PRINT Text
PRINT 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