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은 여전히 습하고 무더웠고 그런 날이 으례 그러하듯, 지루했다. 긴긴 낮이 막 끝나고 그날치의 어둠이 완전히 사위를 뒤덮어 버려, 곤하고 눅눅해진 몸을 눕히려고 짐들을 꾸리는 사람들의 동작 하나하나도 먼 곳의 풍경처럼 느릿하고 막연하게 느껴지던 하루의 끝 무렵. 플랫폼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전철을 타기 위해 플랫폼 한 끝에서 서성이던 나는 푸르게 빛나는 형광등 주위에 새카맣게 날벌레들이 몰려들어 안 그래도 먼지와 더위에 흐릿해진 불빛을 더 보기 힘들게 흩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야산이 있는 역 끄트머리의 일상적인 여름밤의 풍경이지. 질겁을 할 일도, 진기해 할 일도 없는 풍경과 생명들. 무심히 시선을 떨어뜨린 나는 이윽고 전철이 멎어 채우게 될 빈 공간, 아니, 다시 승객을 받으려 입을 열면 텅 빈 속내를 별 수 없이 드러내게 될 커다란 몸피가 머물 공간에 생각을 묶어둔다. 전철을 기다리자.
얼마를 기다렸을까. 의정부행 1184호 전동열차가 눈앞에서 멎는다. 밤이 깊어 드문 사람들이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간다. 느린 걸음으로 자리에 들어가 방금까지 서 있던 플랫폼이 보이는 맞은 편 붉은 색 벨벳 시트로 덮인 끝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 새로운 광원(光源)을 발견한 날벌레들이 무수히 생각을 바꾸어 전동차 안으로 허겁지겁 무리지어 뛰어든다. 그랬거나 말거나 문이 닫히고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쉰 전철은 다음 정거장으로 밀려 올라가기 시작한다.
단연 숫자로는 한 칸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수십 배는 되는 날벌레들이 안으로 들어오자 전철 안은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느긋하게 드문드문 빈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감았던 눈을 뜨고 자신의 목덜미와 팔등과 다리를 기어 다니는 벌레들에 경악을 했다. 자리를 찾아 앉던 모습과는 반대로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먼지를 떨어내듯 벌레를 털어낸 뒤 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하고, 그나마 벌레들이 덜 몰려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기도 한다. 무언가 연신 투덜거리며 몸을 털어내는 사람들은 그런데, 이 조그만 벌레들을 털어내는 데 마음이 쓰여 정작 이 벌레들 중 아무도 자신을 물거나 해코지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끝내 알아보지는 못했다.
사람을 물다니. 기실 전철에 가까스로 올라 탄 이 날벌레들은 자세히 살펴보니 하늘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어린아이들 같은 짓 보다는, 일단 바닥에 내려앉아 날개를 접고 기운 없는 걸음으로 주위를 천천히 맴을 돌며 돌아다니는 게 고작인데. 게다가, 그 많은 날벌레들은 모두 같은 종류에 색깔만 조금씩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그 벌레들이란 -
길고 호리호리한 몸집에 뜻밖의 날개를 달고 있는 개미, 수개미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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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ying Ant Wing Detail Meiji EMZ 4.5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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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전철이 다음 정거장에 서기 위해 속도를 늦추고 마침내 멈추어 섰지만, 사람들의 기대만큼 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개미’들은 문이 다시 열려도 좀처럼 밖으로 나가주질 않았다. 바닥에서 맴을 돌던 대다수의 개미들은 무심히 들어오는 새로운 승객들의 발에 하나 둘 으깨어져, 마치 목탄 조각을 캔버스에 문지른 것처럼 회색의 전동차 안 바닥은 칠한 것 같은 검은 점과 선들로 변해갔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크게 내쉰 전철은 오늘의 예정된 곳에서 쉬고 싶은 제 안의 사람들처럼 다시 레일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정거장을 지날 무렵, 바닥에는 검은 얼룩들이 자꾸만 늘어가는 그 즈음에 여전히 앉을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밖에 있을 때처럼 전철 안 형광등을 두리번거리던 개미 한 마리가 마침내 내 손등위에 앉았다. 부지런히 더듬이로 손등을 건드리는 이 개미는 조금 뜻밖에도 연한 갈색을 띄고 있다. 날개는 위에 한 쌍, 그리고 밑에 한 쌍 이렇게 네 장이고, 위의 날개는 나비의 그것처럼 아랫날개보다 훨씬 크고 길다. 걷기 위해 등 위에 착착 접은 투명한 날개는 연갈색의 적당한 몸집과 어울려 퍽이나 우아해 보였는데, 형광등 불빛을 되비쳐 어른거리는 색을 내었다.
한참을 사위를 살피던 개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검지가 시작되는 손가락 뿌리쯤에서 몸을 둥글게 하고 움직이지를 않는다. 안전하다고 생각이 든 걸까. 그만 고단해져 버린걸까. 나 역시 가방위에 얹은 손을 털어내는 대신 가만히 바닥과 수평으로 손을 맞추어 그의 휴식을 돕는다. 다시 전철이 멎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오고, 그리고 물론 - 문이 닫힌다. 열린 문틈으로 잠시 밖을 바라보다 손등을 바라보니 어느 틈엔가 개미는 사라지고 없다.
얼마만큼 왔을까. 내내 비어있던 맞은 편 빈자리를 채운 두 사람 - 아마도 연인일테지 - 이 얼마쯤 소곤거리는 표정으로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뒤늦게 자신들의 주위에서 맴을 도는 날벌레들을 알아보고서는, 맨살에 주는 스멀거리는 느낌에 질색을 했는지 몇 번을 몸을 뒤척인 끝에 옆 칸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는 와중에 또 세 마리의 날개를 접고 바닥에서 쉬던 개미들이 예쁜 종아리를 가진 여자 쪽의 분홍색 끈이 달린 샌들 밑에서 으깨어졌다. 자꾸만 전철은 인천에서 서울 쪽으로 자리를 옮겨가고, 바닥에서 날개를 접고 느린 걸음으로 걸어 다니던 그 많던 개미들은 이제 대부분 걸음을 멈추고 검은 얼룩으로 자신들의 더운 한 날의 삶을 마친다. 개미에게 죽는다는 것은 무얼까. 호흡이 멎는다, 아니면 맥박이 멈춘다? 단숨에 으깨어져 소멸하는 개미들이 폭죽처럼 여기저기서 명멸한다. 아까, 손등에 앉아있던 개미는 저 얼룩 어디쯤에 있는걸까. 막연한 짐작이, 머물던 손등 어딘가에서 피어올라 머리 근처에서 맴을 돌다 공중으로 날아갔다.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을 무렵, 마침내 다시 열린 문으로 나는 전동차를 빠져 나왔다. 다시 플랫폼에 선 나는 처음으로 몸을 털고 주위 바닥을 두리번거린다. 바닥에는 ‘갈아타는 곳’이란 큼지막한 글자와 화살표만 돋을새김으로 표시된 타일이 있을 뿐 움직이는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지하철 역 승강장은 바깥 지상역사보다 서늘했다. 밤 깊은 시간의 지하 승강장, 머리 바로 위에서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쏟아져 나와 머리칼을 흐트린다. 목마른 이가 내리는 빗줄기를 향해 고개를 쳐들 듯 나는 얼굴을 위로하고 그 냉기를 눈을 감고 가만히 맞았다.
눈을 뜨고 걸음을 다시 시작했을 때, 나는 바닥을 두리번거리는 일 따위는 어느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서 집으로 가야지. 두번을 더 전철을 갈아탄 뒤 집에 도착했을 무렵엔 어느새 시간이 자정에 가까와져 있었다. 길고 무덥고 으례 그러하듯, 지루한 하루였다.
참고 서지 :
http://www.absoluteclari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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