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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 씁쓸한 얘기 하나.
어차피 당사자인 그 후배는 착찹하지만 쓴 웃음을 지며,
나는 골때리게 웃으며 이야기를 일단락졌으니까,
죄책감은 조금 덜고 얘기해보자.
후배는 오랫동안 동아리 선배를 좋아했다.
여차여차하여 다시 만나고 짜릿한 연애모드에 돌입했다.
얼마 후 남자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
후배는 오매불망 선배의 연락을 기다렸다.
어물쩡 관계를 정리하는 그 남자의 이기적인 행보가 괘씸하긴 했지만,
후배의 입을 빌려 듣는 그의 언사들은 꽤 매력적인 구석이 있었다.
대화의 적재적소에 그럴듯한 아포리즘을 읊으며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포즈는
분명 후배의 마음을 사로잡았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죽은 지 30년이 넘지 않은 작가의 글은 글로도 치지않아."
문학동아리 선배였던 그가 이런 말을 내뱉을 때,
얼치기 일학년이었던 후배는 당돌한 그의 오만방자함이 꽤나 매력적이었단다.
그렇게 시작된 연모의 정이 몇 해를 지나는 동안,
그렇게 부풀려진 그의 첫 이미지가 얼마나 뻥튀기됐는지는 알고도 남으리라.
후배는 얼마전,
우연히 '상실의 시대'를 읽다가 그의 당돌한 선언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가와사킨가 뭐시기 하는 작중 인물이 그와 똑같은 대사를 치고 있더라는.
토씨하나 안틀리고.
사후 30년이 지나지 않은 글은 쳐주지도 않는다는 그가
어쩌다 아직도 정신 멀쩡한 작가의 글에 그처럼 심취하여 동일시했는지는
참으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그 다음 수순은 뻔하다.
그동안 선배가 마치 자기것인냥 읊어대던 주장과 사색의 편린들이,
여기저기서 훔쳐다 기운 표절과 치기의 잡종교배라고,
후배는 열심히 재해석하는 중이다.
선배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열심히 메타포를 불어넣어 키웠던 풍선이
일순간 바람빠지는 소리.
물론, 그렇다.
대부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누군가의 말을 슬쩍 빌어 자기 것인양 늘어놓기도 한다.
결국 누군가의 언어를 빌 수밖에 없기도 하다.
더구나 사적인 대화에서라면 그 정도는 애교로 봐주고 넘어가주는
서로의 묵계같은게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해석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자기 좋다는 여자를 앞에 두고 현란한 수사 뒤로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는 모양새는
좀 치졸하잖은가.
좀 어이없고 골때리고 그랬다.
그리고 후배.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위에 근거했는지를 깨달았다는 듯이
내내 쓴웃음을 짓던 후배가 좀 안쓰럽지만 다행스럽기도하고 그랬다.
어차피 젊을 때 거치게 되는 통과의례 같은 건데 뭐. 훌훌 털고 일어나라구.
말과 글에 기인한 '착란', 은 항상 과도한 메타포를 수반한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그래서 "메타포는 위험하다"
아니,
말과 글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 믿고 싶은 어이없는 '착란'이 위험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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