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8일 이후 
모두 명  오늘 명 
메인 페이지  
칼럼 보기  
카툰 보기  
게시판 가기  
사이트맵  
그밖의 것들  

가입하면 정말 편합니다;;
리디의 생각하는 글
리디의 헤드라인
써니의 생각하는 예배자
써니의 헤드라인
마크의 주님과의 열애
마크의 헤드라인
인이 칼럼
인이의 헤드라인
HTML 페이지
- - - - -
준희의 칼럼 I hope
준희의 헤드라인
크리스찬의 애인
조약돌 칼럼
 

Columns
조약돌 칼럼
조약돌의 칼럼 페이지입니다.
조약돌은 리디의 교회친구입니다.

 믿음은 하나의 행위가 아닌가  
 리디  posted at 2003-04-24 20:50:11
3931 hits  0 comments
 http://www.reedyfox.com NeWin reedyfox is level 39  llllllllll 
 퍼머링크 : http://reedyfox.com/island.php/column_etc/9  [복사]

조약돌의 글을 리디가 올립니다.



** 어린 시절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닌 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교회에서 목사님이나 전도사님, 그리고 분반 공부 선생님의 말씀까지 전부를 진실이라고 믿었다. 난 순진했으니까.. 순수함은 아이들만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여하튼 난 다른 아이들처럼 순진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하나님에 대한, 아니 정확히 얘기해서 교회에서 듣는 모든 것들, 어른들이 말하는 것들을 사실로 믿었다.

    하나님이 말로만 천지를 창조하신 일이며, 뱀이 말을 하고, 바다가 갈라지며, 나팔소리에 성이 무너지던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날 감격시킨 돌맹이 하나를 냅다 던져 거인을 쓰러뜨린 다윗의 이야기. 당시엔 성에 대해 몰랐을 때지만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하나님의 아이라고 했던 일과 그 아이가 커서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으며, 죽음이 싫었던지 다시 살아서 하늘로 두둥실 올라가신 일. 그리고 더불어 그가 행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인 일과 침을 뱉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일, 물위를 걸은 일 등등... 아주 자연스럽게, 확실하게, 확고하게 믿었다. 아무런 의심없이... 왜? 교회에서 들은 얘기니까.....


** 어느 중등부 겨울 수련회
    확실하게는 기억할 수 없지만 중학교 1학년 겨울 수련회였던 것 같다. 제자 뭐시기라고하는 아주 볼품없고 열악한 (방에 2층 침대와 난로가 있고, 온수가 나오지 않아 그 난로위에 양동이를 두어 물을 뎁히던) 수련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시설은 둘째치고 프로그램 또한 엄청났다. 밥먹고 강의 듣고, 밥먹고 강의 듣는 아주 심플한 프로그램으로 학생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환상을 보아야했다. 지금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당시의 강의들은 중학생보다는 청년들이나 고등학생에게 맞는 것이 아니었나한다.

    암튼 하루는 그런 똑같은 프로그램에 변화가 있었다. 조별로 식당에 모여서 그 곳에서 봉사하시던 선생님으로부터 구원의 확신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솔직히 난 당시에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을 뿐더러 나서기가 싫어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몇몇은 쭈삣거리며 손을 들었다. "그래? 어떻게 받았는데?" 내 기억엔 같은 조에 있던 손을 든 두명의 학생이 똑같이 '방언'이라고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방언을 받았으니까 구원을 받았다라고.. 충분히 수긍이 간다. 당시에 성령의 임재라는 걸 느낄 수 있는 통로는 그것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들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확히 말해 방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난 그때 처음으로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로부터 창조된 우리들이 죄를 지었으며(고로 나도 죄인이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하늘에서 세상으로 와서 죄의 값으로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 올라가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믿기만하면 주어지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끝이었다. 사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곧 내 기억에서 사라졌으니까..


** 믿음은 선물이다.
  내가 불신자들이나 초신자들에게 믿음에 대해 종종 사용하는 비유가 있다.

  자, 내가 너에게 만원을 주었다고 생각해보자. 이건 너에게 주는 내 선물이고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건 그건 네 맘이다. 맘껏 쓰렴.
  속으로 '왜 이걸 나에게 주지? 분명히 무언가 꿍꿍이 속이 있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만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것이고, '아싸, 땡 잡았다. 땡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만원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사람은 선물을 받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그것을 자기것으로 하지 못했고, 뒤의 사람은 선물로 제대로 받았기에 그것을 자기것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
  구원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란다. 하나님이 너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너가 감사합니다라고 받아들이면 네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이것이 내 것인가라고 의심한다면 그것은 네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내가 give&take에 너무 익숙해져서인지, 아니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래 무언가를 주었으면 되돌려받고 싶고, 누가 무언가를 주면 뭔가를 되돌려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존재여서 그런지 몰라도 그렇게 귀한 구원이라는 것을 아무런 댓가 없이(물론 각자가 값아야할 댓가는 없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댓가를 치룬 것이라는 건 다들 알 것 같지만 혹시나라는 마음에 사족을 붙인다)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건 왠지 나에게 찝찝한 사실로 남아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매력이 아닐까?


** 믿음에 잣대가 있는가?
    고등학교 때인지 아니면 대학에 올라와서인지 역시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내 기억력은 좀 그렇다. -_-;) 언젠가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했었다. 그것 참 싱겁구먼. 그냥 '믿씁니다.'하면 끝나는 거 아닌가? 뭐 그렇게 밍숭맹숭한게 다 있나? 뭐 이렇게 두리뭉실한 얘기가 있나? 내가 워낙 따지는 걸 좋아해서인지 몰라도 믿음이라는 것에 대한 확실한 잣대가 없다는 사실에 나는 계속 불확실 속에 있어야했다. 흔히 말하는 앎과 믿음의 차이에 대해 난 아직도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없다. 언제 들었던 것도 같은데 내 기억속엔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그 대답을 내가 기억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설명일뿐 내것이 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으니까...

    잠깐 생각난 김에 딴소리 하나만 하고 넘어가겠다. '정답이 항상 내 것일 수는 없다.' '답은 알고 있는데 내 것이 아니다.'라는 고민이 한창일 때가 있었다. 그 발단은 여전히 기억못하지만 (왜 자꾸 이번 글엔 나의 기억력이 언급되어야 하는지) 이 고민은 성경공부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성경공부? 그거 무지 쉽다. 가끔 나오는 적용 파트만 빼고는 중학교 수준밖에 안 되니까. 사실 말해서 문제에 달라붙어 있는 성경 주소 찾아서 읽으면 답이 버젓이 나와있지 않은가? 반 이상의 문제들이 별 생각없이도 답할 수 있는 수준인 건 내가 그간 보아온 몇 안되는 교제가 너무 쉽게 나와서만은 아니리라.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입으로하는 답은 쉬워도 행동으로 하는 답은 어렵다는 것. 아무리 쉬운 답이라고해도 과연 그것이 내것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항상 갖자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기분 나빠도 그냥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한 것 밖에 없었다.

    다시 본 얘기로 돌아와서, 어느 정도가 되어야 믿음이라 할 수 있는가? 믿음이 약해서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믿음에도 등급이 있는 것도 같은데 그렇다면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의 등급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리고 과연 어떤 것을 믿음이라 할 수 있는가? 죽어도 놓을 수 없는 것? 그건 신념이 아닐까? 신념은 믿음의 하나의 형태일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믿고 있지도 않으면서도 나는 믿고 있다는 신념으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말은 하나의 말장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에 나에겐 중요한 문제였고, 교회나 어디에서건 가장 중요한 십자가와 구원, 믿음이라는 것은 빠져있고 전도니 괜한 성경 지식 및 살아가는 방법만을 가르치는 것 같은 요즘이기에 한번 짚어보고 싶다.


** 행위와 믿음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라는 말은 교회에 다녀본 아니 기독교라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몇번이고 들었을 얘기다. 물론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에서 나오는 행위는 선한 행위나 봉사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사용된 것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서 행위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자. 행위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한다는 동사가 아닌가? 내가 미련해서인지 몰라도 나는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도 무언가를 한다는 행위의 한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과연 믿음은 행위의 하나의 형태인데 어떻게 믿음과 행위가 구분되어질 수 있는가라는 이상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정말 쓸데없는 고민 아닌가?)

    아니 그것보다 나를 따라다닌 생각은 나의 믿음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글의 처음에서 밝혔듯 나는 거의 모태신앙이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믿음이라는 것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이 들기 시작하였을 때 나는 내 믿음이라는 것이 어쩌면 내가 나에게 거는 하나의 최면일 수도 있다는 걱정이 뒤따랐다. '나는 구원을 받아야 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고로 나는 믿음을 꼭 가져야 한다.'라는 결론에 어쩌면 있지도 않은 믿음을 내 머릿속에 우겨넣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다시말해 있지도 않는 믿음을 '나는 믿음이 있어야 해, 믿음이 있어야 해...'라면서 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고민들...


** 시간 좀 있으세요?
    대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교회를 마치고 과외를 하러 가기 위해 부지런히 지하도를 내려가고 있을 때 옆에서 좀 작은 아가씨가

"시간 좀 있으세요? 기나 도에....."
"시간 없어요. 지금 늦었거든요."


보통 이 정도면 알아서 갈텐데, 내가 발걸음을 빨리 하자 끝까지 따라오면서

"에이, 다들 시간이 없죠."
"전 교회 다녀요. 됐죠?"


이젠 정말 끝이려니 했건만, 대답이 가관이었다.


"에이, 저희는 상관없어요. 수련하는 사람 중에는 교회다니는 사람도 많은데요 뭘.."


힉! 뭔소리랴? 여하튼 그리고는 집요하게 나의 빠른 걸음을 따라붙으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거 이번엔 안 되겠는걸?' 아직까지 한번도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본적이 없는 나였지만 어차피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이니 가면서 말을 꺼냈다.


"기나 도를 수련하는 목적이 뭡니까?"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는 없구요, 오셔서 수련하시면 차차 알게 되실 꺼에요."
"그런게 어디있어요? 됐어요. 말죠 뭐.."
"알았어요. 기나 도에 정통하게 되면 뭐든 맘 먹은데로 할 수 있어요."
"핏. 그러면 참 웃긴 세상이 되겠네요? (이 말은 억지 소리였다는 걸 알지만서도...)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에 오르나요?"
"기독교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오, 어디서 들었는지 좀 아네?) 선한 행위를 하고 착하게 사는 것처럼 수련이 필요하지요..."
"엥? 아뇨. 기독교는 그런거 아니에요. 구원이라는 건 그냥 주는 거에요. 선물이요. 수련이니 선한 행위니 그런 것 필요없어요..."
"그래도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선....."
"그런건 기독교 안에도 다 있어요. 그런게 없으면 왜 기독교에 남아있겠어요?"
"그러면 준회씨는 (어느덧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이름을 알려주었던 것 같다.) 구원 받았어요?"
"예!!"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너무 확고하게 구원 받은 사실을 말했으니까. 그러자 그 아가씨는 계단 중간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눈을... 그러더니


"눈이 참 맑으시네요..."


라고 말하곤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과외를 위해 버스를 탄 나는 계속 후회가 되었다. '그 때, 붙잡고 더 얘기를 했어야 하는데....' 나를 바라보던 약간은 서글픈 그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동시에 전하지 못했던 안타까움도. 한번 더 볼 수 있을까하여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찾아보았지만 그 후론 그 아가씨를 본 일은 없었고, 나는 그 아가씨가 복음을 듣길 기도할 뿐이었다.


** 고백
    위의 경험으로 나는 입술의 고백이라는 것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성경이나 사영리에 나오는 입술의 고백이라는 의미를... '너가 하나님 앞에 나를 시인하면...', '다음의 기도문을 따라 하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나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내 믿음을 드리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너가 지금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서 너의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구원에 대한 믿음이 생겨서가 아니라 너가 자신에게 건 너가 믿고 있다는 믿음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냐?"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믿음이 없이는 이렇게 입술로 고백할 수 없다고,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로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감사하게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믿음이 하나의 행위로 머물지 않으려면, 그것이 진정으로 나의 것인지를 확인하려면, 아니 그것이 진정으로 나의 것이라면 어느 상황이건 어느 곳에서건 당당하게 그 사실에 대해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이라는 것은 주저할 것이 없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혹시 예전의 나처럼 구원에 대한 믿음에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나의 경험과 결론이 도움이 되길 비란다. 아울러 자꾸만 희미해져가는 십자가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 가치를 잃지 않길....
(2000.12.24)


  PRINT Text  PRINT HTML  

  Trackbacks for this Posting (0)
'생각하는섬 바닷가 - 믿음은 하나의 행위가 아닌가'
LIST ALL               GO TO THE TOP

- 이글 위에 있는 글 : 봄 그 따스한 만남
- 이글 아래 있는 글 : 목사가 별건가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생각하는 섬, 바닷가는 리디가 운영하는 개인 칼럼 사이트이며 일부 컨텐츠는 리디 외의 필진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이곳의 모든 컨텐츠는 출처(Deep Link URL) 및 작가를 명시하는 조건으로 비상업적 용도의 전제/복제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곳에 게재된 컨텐츠의 취지 또는 작가의 의도가 왜곡되어 해석될 수 있는 컨텐츠 변형은 금지합니다. 이곳에 기재된 전자우편주소에 대한 일체의 수집행위를 거부합니다.(게시일 2008년 1월 1일)
Google
  김선정 - 더하거나 뺄 것 없는  
Window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