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 옹호주의/베르세르크/일원론==
일본인 미우라 켄타로(三浦 建太郞)가 지은 만화로 ‘베르세르크(Berserk)’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지금껏 26권의 단행본이 만들어졌고, 그럼에도 아직 이야기는 깊은 심연에 잠겨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알레고리(allegory)입니다.
구체적인 시대는 실존했던 역사와 무관하나 - 스크린 속 황량한 타투인(Tatooin) 행성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우주 저편의 어느 은하계에 속한 어딘가에는 저런 흙먼지 날리는 행성이 존재할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듯 - 다른 어느 작품보다 충실히 중세유럽의 암흑기를 이미지화하고 있는 이 만화 속에 견고히 구성된 세계는, 재앙이나 저주라는 말이 오히려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그 모든 것들과 싸우고 또 싸우는 검은 검사(劍士) 가츠를 둘러싼 가츠가 아닌 모든 것들이 내뿜는 한없는 적의로 숨이 막히는 어둡고 무거운 존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새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 같은 성상(聖像)과 그 주위의 견고한, 그러나 인간계(人間界)를 집어삼키고 있는 유계(幽界)에 대항하여 인간의 영과 육신에 안전과 평화를 부여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신(神)과 그것을 떠받쳐 세상의 권력을 유지하는 교황청과 기사단, 그들과 경쟁하며 권력을 분점하는 왕국 영주 그리고 그 속의 사람들은 제물의 낙인이 찍혀 목적지까지의 여행을 계속하는 한 하루도 안식할 수 없는 가츠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하루하루를 현세에 도래한 지옥으로 만들기에 더없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찢어버릴 것만 같은 선과 면의 분할 말고도 가츠의 고통과 분노를 생생하게 해 주는 것은 그가 이야기 속에 갇혀있는 세계입니다. 희망과 구원이 사라진 세계. 마물(魔物) 혹은 견고한 육신을 부여받은 이승의 악령들은 미쳐 날뛰는데 그들을 제어할 자비의 신성(神聖)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고, 교회는 끊임없이 무고한 이들을 마녀로 잡아 죽이는 것으로 소임을 대신하며 성스러움이 가득해야할 그곳을 고문도구와 고문리들 그리고 고문당하는 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으로 가득 채우는 지옥의 모습이 가츠와 그 곳의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모든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에 대항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긴장은 보통 그런 식으로 생성되고 우리는 그들의 갈등을 지켜보며 어느 한편에 자연스럽게 서게 되지요. 그런데 베르세르크에는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 전부가 그에게 적대적입니다. 인간으로, 신성(神性)을 가져버린 대항인물(antagonist) 그리피스와 싸우기 위해 가츠는 온몸을 던져야 합니다. 잠깐의 안식조차 얻지 못하는 가츠와 더불어 저 역시 한없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움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은 단순히 그리피스가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르세르크의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경계가 사라져 있습니다. 현실은 철저히 악에게 유린당하며 신의 뜻을 대신하는 교회는 한없이 무기력합니다. 어느 곳엔가 안식을 보장할 선이 존재하리라는 기계적 이분법마저 지켜지고 있지 않은 지상이 주는 절망감과 공포. 이것이야말로 이야기 속에서의 삶을 회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느꼈던 공포를 내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이유입니다.
앞글에서 저는 이야기한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선과 악은 서로 대립하며 그 대결구조는 영원해야 함을 뜻한다고 강조하여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성경이 예정하고 있지 않는 세계관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언뜻 보았을 때는 베르세르크의 세계관과 서구의 성상파괴주의의 한 지류인 합리주의가 바라보는 세계인 이원론의 세상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그리고 동일하지 않은 만큼 만화 쪼가리가 만들어 내는 세상의 공포 따위는 지금 우리의 삶과 하등의 상관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알려지지 않은 이원론의 다른 얼굴이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합리주의와 관련지어서 이원론적 세계관이야 말로 성경적이며 보편타당한 우리의 오늘을 그려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원론에서의 선과 악은 그렇게 모두가 바라듯 '공평하게' 우리 앞에 놓여져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문제의 전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위해 악용한 이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불가리아, 이탈리아, 프랑스등 서유럽에서는 마니케이즘(manicheism)적 전통에서 갈라져 나온 카타리파라는 교파가 등장합니다. 세부적인 교리는 영지주의적(gnostique)이며 구세주에 의한 구원을 신봉하는 구조론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어서 지극히 타당해 보이는 이 교파는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마니케이즘과는 달리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세를 선과 악이 혼융된 곳이 아니라 악이 엄연히 실존하는 부정해야 할 악 그 자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악이 현존하는 현세는 악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며 오직 영적인 세계만이 선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교리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교파를 이끄는 우두머리들이었습니다. 악하디 악한 세상, 그러나 그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지도자들이라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카타리교파에서는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완전자들’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완전자들은 죄의 용서를 받은 자들이며 선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전을 지닌 사람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카타리교파는 이원론을 이용하여 세상과 구별되는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한 셈입니다.
이러한 극단적 이원론에 기초한 교파는 오래전 이단의 꼬리표를 달았고 이제는 문헌상의 기록으로나 남아있는 자료만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맞습니다. 카타리교파는 지금 우리의 신앙으로 보아도 참으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였고, 우리는 누구라도 그들의 오류를 어렵지 않게 지적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타리교파가 자신들의 세계관을 짓는데 이용한 이원론적 관점에 의해 재단된 기독교라는 위험은 수시로 모습을 달리해 우리들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선포하는 자의 입술에 따라서 경계선이 얼마든지 바꿔 그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서 욥을 열렬히 정죄한 세 친구가 그토록 단호할 수 있었던 것은 선(善)이 그들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었고, 중세 유럽에서 면죄부가 우리의 죄를 사했을 때에도 선은 우리의 편에 있었기에 문제가 될 수 없었고, 신사(神社)에 깃든 일본왕실의 혼령들에게 참배를 올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어렵지 않게 동거할 수 있었던 것도 선은 우리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며, 2002년 한국의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 후보의 당선을 위해 저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한점의 머뭇거림 없이 거룩한 성전에서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그렇게 선포된 말씀에 힘차게 ‘아멘’ 할 수 있었던 것도 선은 우리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원론이 우리의 신앙 안에서 부지런히 선 긋기를 계속하는 한, 우리는 영원한 완전자이며 저들은 영원한 악이 되어줌으로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삶이 가츠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쉼 없이 베어내어야 하는 악으로 충만한 그 속의 삶과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공포가 현실화되어 내 삶 속에 들어온다면 두렵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러 무던히 애를 썼고, 그리고 복음이 이원론을 합리화함에 귀결될 수 없음을 발견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고민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와 일관한 결론을 알아내어서 꼼꼼히 정리한 독일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이미지에 의한 직관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특권을 부여하면서, 순수이성(reine Vernunft)과 실천이성(praktische Vernunft)곁에서 기호판단을 통한 인식의 과정’을 이론화 하였습니다. 이 말이 성경과 무관하며 이해할 수 없는 관념의 말장난처럼 들리시는지요(제 말과는 비슷하지도 않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경계를 잇기 위해 예수님을 선물로 주셨고 우리는 그 선물을 통해 영혼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시대인 오늘에 선물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위에 너무도 흔한, 싸구려 선물로 취급받을 지언정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으로 구별되지는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받으려는 이들이 뿌리칠 지언정. 이것이 이원론과 비슷하지도 않은 성경의 놀라운(그리고 공공연한) 비밀이며,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자신의 인식론을 학문으로 정리하면서 더 간명하게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고 우리의 영혼이 보다 향기롭기 원하며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 보는 이들에게 구원의 기적을 일으키기에 필요한 것들은 이전의 이원론에 힘입어 나까지만 선(善)으로 금 긋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단죄(斷罪)’와 ‘면죄(免罪)’ 사이를 편리하게 오가며 지금도 부지런히 성경을 한 손에 든 채 선과 악의 나눗셈을 하는 사람들이 결코 그 말씀에 정작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 서지 : 칸트 판단비판력 연구, 김 광명 1992
예술적 인간, 조 경식
베르세르크, 미우라 켄타로 1989
인터넷
http://digilander.libero.it/goku04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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