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는 그날 밤 1시에 뒤랑의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세헤라자데에서 걸었다. 야근 간호사가 여자 분은 잠들었다고 말했다. 두 시간쯤 전에는 괴로운 것 같았으나, 베베르가 와 있어서 가벼운 수면제를 주었고, 만사가 순조로운 것 같다는 것이었다.
라빅은 전화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강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탈색해서 머리를 노랗게 만든 여자가 거만하고 도전적인 태도로 옷자락소리를 내며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병원에 누워있는 여자는 진짜 블론드였다. 눈부실 정도로 번쩍이는 붉은 빛이 감도는 블론드!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세헤라자데로 돌아갔다. 변함없는 러시아 합창단이 변함없이 <검은 눈동자>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 노래를 이 세상에서 20년 동안이나 부르고 있다. 20년이나 계속하면, 비극도 익살맞은 것이 될 위험이 있다고 라빅은 생각했다. 비극은 짧아야 하는 것이다.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는 유작을 포함해서 겨우 열 두편의 소설밖에는 쓰지 않았고, 그중 대부분은 우리가 전쟁 문학이라고 손쉽게 분류해버리는 것들이라 그나마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거기에 '고전(古典)'이라는 이상한 딱지가 붙고, 전집류의 뭉텅이스러운 질감에 천편일률적인 하드커버까지 가세하는 통에 도저히 자청해서 읽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핸디캡'을 안고 있는 형편에 놓여있다.
나는 이 책을 한달을 꼬박 걸려 읽었다. 여름 끝 무렵부터 가을 초입까지. 매일 밤에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가 놓인 한쪽 벽에 기대어서 말이다. 편하게 읽다 잠들려 했지만 밑줄과 메모를 위해 펜을 찾는 수고를 안한 날이 하루도 없었기에 그것만큼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가을 밤에 읽을 수 있는 소설. 이정도만 되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이지만, 이 책은 마치 경전(經典)처럼 60년이 넘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불가사의한 잠언들을 책 여기저기에 숨겨놓고 있다는 것 역시 꼭 말해야 겠다. '비극이 익살이 될 위험'. 라빅의 생각은 세기를 넘어 2004년 극동 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친일진상규명법'과 '국가보안법'이라는 그 자체로서 더이상 정당할 도리가 없을 두 개의 실정법을 통해 그 진정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 그 한 예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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