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3일 때, 남들이 다 하는 급장을 해 본 적이 있다.
하루는 자율학습시간이었다. 마침 담임선생님이 며칠 출장을 가셔서 부담임 선생님이 반을 임시로 담당하고 있었다. 그 분은 여자인데다가 좀 못생긴(죄송..) 노처녀선생님이라 은근히 반 애들이 깔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좀 껄렁거리는 애 몇명이 수업끝나고 그대로 책가방을 싸더니 집으로 가려는 것이다. 물론 여선생님은 당황해하며 한마디 했지만 덩치에서부터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난 그때 반장이었다.
난 그 애들보고 가지말라고 했다. 약간의 신경전 끝에 결국 애들은 책가방을 내려 놓았다. 나중에 보자는 은근한 협박과 함께. 참고로 난 덩치가 큰 편도 아니고, 싸움을 잘 한다는 인상도 주지 못하는 외모의 소유자다.
고1(아니면 2) 겨울방학 때, 아는 형집에서 우연히 얇은 책자를 하나 봤는데, 그야말로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난 느낌이었다. 두려움과 해방감의 혼재. 제목은 '학교는 죽었다'. 저자는 독일인, 아니면 영국인이었던 것 같다.
난 그때 이미 기존교육체제에 대한 막연한 불만과 어찌할 수 없는 체념상태, 그리고 내가 제도권의 안락함을 스스로 팽개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에 싸여 있을 때였다. 난 제법 공부를 하는 편이었다.
그 책은 내게 내가 처한 현실을 적절한 용어로 구체화시키며 직시할 수 있게 하였고 감히(!!!) '학교가 죽었다'고 동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지금 와서 보면 교육시스템이란 것에 눈을 뜬 것이다. 즉, 내가 처해 있는 교육체제는 수만가지 있을 수 있는 교육방식 중 하나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 이후로 나의 미미하나마 절실했던 기존교육의 거부의 몸짓들에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마련됐던 것이다.
앞서 자율학습 시간에 내가 그 애들을 못 가게 막은 것은 학교방침때문이 아니었다. 난 그 애들에게서 부담임을 깔보고 자기의 힘을 남용하는 소영웅심을 보았다. 그런데 그 대상이 남자선생님쯤만 됐어도 난 가만있었을 것이다.
난 그들을 막을 아무런 명분도 자격도 없었다. 교칙..따위는 내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좀 더 현실직시적이고 근원적인 명분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들을(우등생 들러리에 불과한) 막을 명분은 단지 교칙쪼가리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대로 보내버리면 앞으로 벌어질 체제의 질서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난 그때 반장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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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으로서의 인간은 본능적으로 질서를 원한다. 아니 질서유지를 원한다. 새로운 진실이, 또는 원리가 밝혀졌다 해도 그걸 수용하고 응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존 시스템의 재정비(거의 붕괴에 가까운)와 적응하는데 따르는 학습노력,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믿어왔던 가치관의 혼란과 정체성 상실(일시적이나마)을 못 견뎌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인류는 무수히 겪어 왔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고. 그때마다 가장 반발하는 세력은 기존 시스템속에서의 수익자(기득권)와 그 속에서의 대다수의 기층대중들이다.
전자는 자기의 지위박탈을 두려워하고 후자는 자기의 가치관상실을 두려워한다. 전자는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고 후자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 1999.10.24 sbs자토방에 썼던 글
사진출처 :
http://ipcp.edunet4u.net/~koreannote/4/hero/hero.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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