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 배우 멜 깁슨이 만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이하 <패션>)는 게쎄마네 동산에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12시간 동안 벌어진 '예수의 수난'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만든 동기에 대해 멜 깁슨은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런저런 평가가 다양하게 나오고는 있지만 <패션>이 성서를 충실히 재현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멜 깁슨 스스로도 "해석보다는 성경의 기록을 충실히 재현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영화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예수 당대의 언어였던 아람어와 라틴어를 사용해 미국 관객들에게조차 영어 자막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충실한 재현'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이 같은 <패션>의 리얼리즘은 영화가 드러낸 흠집들에 시비를 걸 수 없게끔 구실 한다. 엽기 공포 영화를 뺨치고도 남는 잔혹 장면이 꼭 필요했느냐, 인물들이 평면적이다, 화면의 새로움이 없지 않느냐, 와 같은 질문들을 사소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누군가 <패션>을 문제삼으면 "그것은 나의 판단이 아니라 성서의 기록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과연 성서를 충실히 재현했는가
그러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패션>은 결코 리얼리즘 영화가 아니다. 성서의 문구를 거의 그대로 인용하면서 비직업 배우를 등장시키는 등 예수의 전 생애를 네오리얼리즘의 사실적 기법을 활용하여 조망한 이탈리아 파졸리니 감독의 <마태복음>(1964)과 같은 그런 독특한 리얼리즘을 멜 깁슨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와 <패션>을 단순 대비해 보기만 해도 '리얼리즘이 아니다'는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있다.
게쎄마네에서 골고다에 이르는 성서 속 수난사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전체를 꿰뚫고 나가는 철저하게 무신론적인 분위기이다. 그러나 멜 깁슨은 예수의 수난사 곳곳에 사탄의 이미지를 배치하여 무신론적인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깨뜨리고 있다. 물론 이 사탄의 이미지는 성서 속에서는 제시되지 않는다.
또 하나, 영화의 흐름 중간 중간에 플래시백 기법으로 수난 이전의 삶을 보여주는데, 이 때의 보여줌은 어디까지나 멜 깁슨의 '선택'이다. 성서 속에는 플래시백이 없다. 플래시백을 통해 멜 깁슨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예언자로서의 예수. 이 또한 수난사의 무신론적 분위기를 깨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다.
예수와 함께 못박힌 '강도'들 중 하나가 예수를 향해 불경스러운 말을 뱉어 까마귀가 그의 눈을 파버리는 장면은 우습기까지 하다. 영화의 흐름상 까마귀는 하나님의 메신저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는데, 예수를 잔인하게 고문한 로마병정들은 그대로 두고 단지 고통스러워서 홧김에 한 마디 한 '강도'를 벌하는 하나님이라니, 얼마나 우스운가. 실제로 수난사를 기록한 성서의 복음서에 까마귀는 등장하지 않는다.
수난사의 무신론적 분위기를 깨려는 멜 깁슨의 집요한 노력
예수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보려는 노력도 <패션>에는 없다. 기원전후 중동 지역의 보편적인 얼굴이 현재 서구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주장은, 꽤나 설득력 있게, 진작에 제기됐었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은 멜 깁슨의 자유이다. 그렇지만 영화를 찍는 동안 분장에만 하루평균 7시간을 들였다는 식으로 '사실적 재현'을 뽐내는 <패션>이 미국 개신교의 홍보용 달력에 나오는 얼굴 이미지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흉내냈다는 것은 그가 어떠한 입장에서 <패션>을 만들었는지를 암시한다. 그것은 할리우드가 하늘처럼 떠받드는 '대중성'이다.
<패션>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매질 당하는 예수, 걸레처럼 찢어진 메시아의 몸뚱아리다. <패션>이 리얼리즘일 수 없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여기에 있다. 성서 어디에서도 로마병정들이 영화에서처럼 예수를 잔혹하게 매질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다. 그처럼 고문을 당하고도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어쨌든 그 매질은 성서의 기록이 아니라 멜 깁슨의 상상이다. 사실 재현을 전방위적으로 내세우는 영화의 지배적인 이미지가 상상이라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의 십자가를 나눠 짊어진 사람이 성서에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만 밝히고 있음에도, 로마 군인의 입을 통해 그가 '유대인'임을 강조하는 것은, 악역으로 나오는 유대인에게 영화적 면죄부를 주려는 참으로 쫀쫀하고 작위적인 배려이기도 하다. 예수에게 채찍을 휘둘러 대는 로마병정의 웃음소리는 또 무엇인가. 그들은 직업군인일 뿐 사디스트가 아니다. 유치한 선악 이분법이다.
없는 사실을 끼워 넣고, 개인의 주관적인 선택을 개입시키고, 확인 불가능한 상황을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으로 연출하면서 '성서의 충실한 재현'을 내 세운다는 것은 당연히 올바른 태도일 수 없다. 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패션>은 위선적인 영화이다.
영화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매질 당하는 예수, 걸레처럼 찢어지는 메시아의 몸뚱아리다. 그러나 성서 어디에도 로마병정들이 영화에서처럼 예수를 잔인하게 매질했다는 기록은 없다. 로마병정들에 의한 예수 고문은 종교계에서도 여태 확인하지 못한 '의문'으로 남아 있다.
영화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멜 깁슨의 상상에서 나온 것
잔혹 장면의 알리바이를 성서의 권위로 확보하여 기독교도인들의 '원죄의식' 건드리기가 <패션>의 전략이다. 신파조의 음악과 우러러 보는 눈동자 따위의 할리우드 고전문법 위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충격적인 채찍질 장면을 얹어 '원죄의식'이 없는 비기독교도들에게까지 영화적 흥미를 가져다 준다는 면에서 <패션>은 주도면밀하게 계산된 상업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블레어윗치> 이후 미국에서 나온 가장 영리하게 마케팅된 영화이다."라는 데릭 엘리(『버라이어티』 수석 영화평론가)의 일침이 설득력 있다. 결과적으로 <패션>은 대박을 터뜨렸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간 구체적인 계기는 '성전숙청'이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경제적 매매행위가 이루어지는) 강도의 집이 되어버렸다"(마르코, 11장 17절)며 성전 앞 광장의 장사꾼들을 좇아냈다. 이에 위협받은 이들이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인 유다교 랍비들과 바리사이파들이었고,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들이 예수의 사형을 주장했다.
아이러니다. 지극한 카톨릭 신자라는 멜 깁슨이 <예수의 수난>이라는 '성전'을 활용해 스스로 '강도'가 된 꼴이다. 멜 깁슨은 '성서의 충실한 재현'을 방패삼아 자신의 진정성을 호소하고는 있지만, 할리우드식의 재현이라는 것이 종국에는 마케팅에 종속될 수밖에 없음을 <패션>은 보여주고 있다. <패션>은 예수의 가르침을 배신한 예수 영화가 돼버렸다.
|
명 오늘 
명
PRINT Text
PRINT 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