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의 열악함을 보충하기 위한 시도는 군대에서도 계속 되었다. 그래서 어느날에서부터 모든 편지는 아래아 한글로 작성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편지지에 그대로 옮겨 적어서 부쳤다. 그 파일이 아직도 있다. (군 시절 쓰던 PC를 아직 사용하고 있음)
아래 편지와 그 답장은 분명 언급했던 기억이 난다. '기억도 진화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한 번 글을 올렸을 것이다.
부장님 보세요.
제 문제점들 중에 현저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아마 ‘가식’이 아닐까 합니다. 가식이라고 하면 너무 안 좋게 들리지만 다른 표현을 빌자면 ‘체면치레’, ‘내숭’과 같은 의미겠지요. 누군가가 제게 말했습니다. 왜 기면서 아닌 ‘척’하니? 부끄러웠습니다. 왜냐구요? 기면서 아니라하고 아니면서 기라 하는 건 가식이고 체면치레고 내숭이고를 따지기 이전에 ‘정직하냐 정직하지 않냐’를 붙들고 있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식은 드라마틱한 삶을 못내 잊지 못하는 천성으로 말미암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너무나도 깊은 감수성을 지녔으므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 밥도 먹지 않고 심지어는 물도 먹지 않으며 다만 “생각없어.”라고만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언제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콜라도 잘 마셔요. 이건 너무하잖아요!
그런 공상의 세계는 일단 제쳐두어도 문제는 있어요. 부장님도 아시겠지요. 제가 역시 도를 덜 닦았다 싶은 게 - 그런데요, 늘 그래요. 오늘의 내가 보는 어제의 나는 늘 부끄럽죠. - 공연히 잘 뵈고 싶고 마치 교회 수련회 가서 알지도 못하는 낯선 계집아이들 앞에서 발걸음마저도 조심스러워지는 거 말예요.(스물 여섯 살짜리가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우스꽝스런 일이 아닐까요!?)
차라리 100퍼센트 솔직담백하지 않을 바에야 모든 것에 눈을 감아버리는 게 어떨까 싶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우둔한 행동일 것도 같구요. 털어 놓을 사람이 없어 주저리 주저리 부장님께 글 올립니다. 이만요.
2002. 3. 11. 월. 승혁 드림
그리고 최윤진 부장님으로부터
받은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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