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다니는 건전지 상자는 10개들이 가로로 길쭉한 모양이다. 새 건전지와 쓴 건전지를 각각 양쪽으로 몰아 놓는데, 꺼내서 쓸 때마다 어느 쪽이 새 건전지가 있는 쪽인지 잠시 헷갈린다. 한쪽 귀퉁이에 스티커가 붙어있어서 그 부분을 기준 삼자고 다짐했지만 헷갈리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스티커 붙은 쪽이 새 건전지가 있는 쪽인지, 헌 건전지가 있는 쪽인지 기억이 안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티커'라는
기호와 '새 건전지가 있는 쪽'이라는
의미가 효과적으로 연결, 인식되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다. 만약 스티커 대신 네임펜으로 '새 건전지'라고 표시해두었다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시가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시내버스 운행체계 변경작업은 쓴 웃음을 짓게 만든다. 다들 보셨겠지만, 버스 옆면에 대문짝만하게 'G, B, R, Y'라고 도색해놓았다. 이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저 '지선, 간선, 광역, 순환'라고 적었다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을,
굳이 알파벳으로 표기함으로써 '기호'를 '의미'와 연결하는 작업을 혼란스럽고 번거롭게 만들었다. 더욱이 그 알파벳들이 버스의 색깔을 나타내는 영어단어의 머릿글자 그 이상 의미가 없다는 점은 큰 문제다. 버스를 이용해 수도권 시민들에게 영어단어라도 가르치겠다는 포부일까? 정말로 소위 '글로벌 시대를 위한' 작업이었다면 차라리 '지선, 간선, 광역, 순환'에 맞는 영어 단어를 찾아 그 머릿글자를 크게 적고 아래에 조그맣게 단어를 표기하는 방식을 택했어야 옳을 것이다. 그게 외국인들에게도 좀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렇듯 명분도 없고 실용성도 없이 알파벳을 수천대 서울시내 버스에 붙이고 다니는 건 우리가 여전히 문화종속국(중화->미화)임을 처연히 인정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또 앞으로 이런 형편을 바꿔나갈 의지도 없음을 고백하는 꼴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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