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 마저 '대단히 기독교적인 메세지가 담긴 영화'라 평가하는 내가 기네스 팰트로가 주연을 맡은 1998년작 '슬라이딩 도어스(Sliding Doors)'를 보고 '기독교적으로 감동' 받았다고 말해도 그닥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래의 내용에는 이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원치 않는 분들은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오래된 영화이므로 줄거리를 되짚어 보자. 우선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헬렌(기네스 팰트로)과 그의 우유부단한 바람둥이 동거남 '게리', 그리고 익살이 돋보이는 새로운 귀여운 남자 '제임스'.
영화는 헬렌이 근무하던 회사에서 졸지에 해고 당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허탈감에 빠진 그녀는 예정에 없이 집으로 일찍 돌아가게 되고 아슬아슬하게 문이 닫히는 지하철을 타는/놓치는 이후부터 달라지는 두 가지 인생을 영화는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일단 감독이 관객들에게 주입하려는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지하철을 탄 헬렌'은 일이 제대로 되고 있는 쪽이다.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진 귀고리를 주워주는 호의를 베푼 사내가 지하철 옆자리에 앉게 되고 짧은 대화였지만 지저분하게 추근대는 부류는 아닌 것 같다. 동거녀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던 게리가 한창 벌거벗과 정부와 놀아나는 현장까지 잡는다. 반면 '지하철을 놓찬 쪽의 헬렌'은 날치기범과 몸싸움을 벌이다 상처까지 입고 그때문에 귀가가 늦은 탓에 헬렌이 알지 못한채 게리의 불륜행각은 계속된다.
'지하철을 탄 헬렌'은 게리를 떠나 친구 애나의 집에 머물며 배신의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속깊고 붙임성 있는 제임스가 그녀 가슴의 빈자리를 조금씩 채워간다. 그의 격려에 힘입어 직접 창업의 일선에 나서게 되고 일이 잘 풀려 사업에도 물고가 트이게 된다. '지하철을 놓친 헬렌'은 그야말로 엉망이다. 만년 소설가 지망생인 동거남 게리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돈은 벌어야겠고 하루종일 시간제 부업을 뛰며 과로에 쓰러지기까지 하지만, 정작 게리는 정부와 놀아나는 데 여념이 없다. 거기에다 헬렌이 게리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되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영화가 절정에 이르는 부분이 여기다. 제임스의 별거중인 처를 두고 오해가 벌어져 둘의 관계는 위기를 맞지만, 이내 그의 진심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화해를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불의의 사고로 헬렌은 중상을 입는다. 그와 같은 시간, 마침내 게리의 불륜을 알게된 헬렌은 게리와 실강이를 벌이다 추락사고를 당한다.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수술실로 실려간 두 사람의 헬렌.......... 나누어졌던 두 가지 인생은 '지하철을 탄 헬렌'의 죽음으로 다시 하나의 인생('지하철을 놓친 헬렌의 인생')으로 모아진다.
지하철을 놓치지도 않고 날치기를 당하지도 않았으며 게리의 불륜사실을 모른채 속아넘어가지도 않고 힘들고 무시당하는 일을 쓰러지기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던, '지하철을 탄 헬렌'의 인생은 관객에게 적어도 1시간 20분 동안은 '제대로 풀린' 인생이었지만 그렇게 죽어버린 삶을 누가 값있다 할까. 직장에서도 해고 당하고 날치기에 병원신세까지 지고 동거남에게 철저하게 속은 데다 동거남의 정부에게서까지 멸시를 당한 그녀였지만, 이제 쓰레기같은 게리도 떠나보내고 게리의 아이도 사고와 함께 유산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병원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선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 서 있는 건 그녀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헬렌'의 제임스였다. 둘은 '이제' 시작할 것이다. 관객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아.... 이게 차라리 잘 된 것이로군 하고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서치라이트 같지 않고 등불 같아서 한 발 한 발 앞만을 볼 수 있다. 그 앞의 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그럴 줄 뻔히 알고 있는 것들을 두고 누구는 염려하고 누구는 괘념치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스타크래프트의 안개와 달라서 맵핵 따위는 먹히지 않는다. 걸어온 길만을 되돌아 보며 제대로 인도되었음을 혹은 내 맘대로 엇나갔음을 깨달을 뿐이다. 닫힌 문 앞에서 절망하지도 말고, 지하철 의자에 앉아 마냥 안심하지도 말아라. 120분 뒤에 봐야 아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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