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의 인과관계론 편을 보면 갖가지 학설이 소개되는데 어느 교과서를 보든지 가장 먼저 소개되는 것이 '조건설'이다. 이 조건설은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모든 조건은 같은 가치를 가진다'는 명제를 기초로 한다. 이것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우스운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왕비가 백설공주의 미모를 시기하여 변장하고 그녀를 찾아가 독이 든 사과를 건넸다고 치자. 그런데 백설공주가 사과를 먹기 위해 과도하게 입을 벌리다 그만 턱이 빠졌다. 급한 마음에 119 구급대를 불러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규정속도 이상으로 질주하던 호박마차와 정면충돌하는 바람에 다리가 골절되었다. 어찌어찌하여 병원에 도착, 골절상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나 그만 의료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는데...... 조건설에 따르면 왕비가 백설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주지 않았다면 이 모든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왕비는 살인죄의 구성요건을 충족시키게 된다.
이런 조건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독일의 법원에 의해 인정되고 있는 것은 걔네들 나라의 법조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조건설의 그 '조건'이라는 것에 다양한 해석상의 제한을 가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조건설 이후로도 많은 개량 학설들이 나왔지만 따지고 보면 이 원초적인 조건설에 어떤 해석을 더하고 빼느냐만 다를 뿐인걸 보면, 결국 문제는 그 조건의 해석 범위인 셈이다.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은 이 조건설의 시각에서 미국 주류를 반어적으로 비판한 영화다. 콜럼바인 고교에서 총기를 난사한 십대들이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모든 것이 저급한 십대들의 대중 문화 탓으로 결론 지은 주류들은 본질적인 원인(미 정부와 매체의 공포 조작, 무분별한 총기/탄약 판매와 관리 등)은 외면했다. 그러자 무어 감독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총기를 난사한 그 아이들은 평소에도 볼링을 즐겨 쳤고, 사건 당일 아침에도 볼링을 치다가 학교에 가서 참사를 일으킨 것인데, 왜 당신들은 볼링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거나 전국의 볼링장을 규제 또는 폐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가? 각종 매체에서는 왜 볼링의 정신의학적 해악성을 알리는 내용을 보도하지 않고 종교단체에서는 신도들에게 볼링장에 가지 말 것을 권면하지 않는가?"
미국 사회의 주류들의 불합리한 조건설을 무어의 방식으로 조롱한 것이다.
이렇게 별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은 건 다 위 기사 때문이다. 2월에 접속 차단 당했는데 자살한 것은 6월. 이것을 사이트 차단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조건설 중에서도 가장 원론적인 형태의 조건설을 지지하는
미치광이인셈이다. 그 유서격으로 최후에 남겨진 글을 읽어보니 실연의 아픔을 절절히 적은 글이던데, 왜 사이트 차단이 원인이라는 단정을 내렸을까?
덧.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올라왔다면 혁신적인 인과관계 이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 개무현 때문이지...."
아.... '20代 악플폐인 노 대통령 때문에 세상 살 맛 안나... 투신' 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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