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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지나가는 화면으로 몰래카메라 형식의 우스개스런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설정은 이렇다. 연기자인 여성이 지나가던 시민을 붙잡고 험상궂은 남성(이 사람도 연기자)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내 손가방을 훔쳐갔으니 붙잡아 달라'고 부탁한다. 몇몇 시민이 얼결에 나서보지만 억지로 빼앗아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했더니 그 여성의 가방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성난 남성의 항의를 받고 곤욕스러워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냥 재밌자고 꾸며본 방송이겠지만, 실제로 여러분에게 저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행동하시겠는가?
단순한 생각으로, 팔을 걷어부친채 다짜고짜 문제의 남성에게 달려가 가방을 빼앗는 사람이 멋있고 정의로워 보인다고 반응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생각을 좀더 깊이 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여성의 부탁을 받아 물리력으로 남성을 제압, 가방을 빼앗는 것은 자구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자구행위란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가 공권력의 발동에 의하지 않고 '직접' 그 권리를 되찾아 오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설사 그 남성이 가방 절도범이 맞다손치더라도 정의의 시민은 그 남성에게 폭행 또는 상해의 죄목으로 고소를 당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 여성이 주장하는 절도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녀의 주장에 따라 그 남성을 절도범으로 의심할 가능성의 이면에 혹시 이 여자가 나 자신을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 그 남성이 엉뚱한 피해자가 되는 건 아닌지 - 하는 의심의 가능성이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실제 사건에 있어서 피해 여성은 경찰에 전화하는 등 공권력에 기대는 것이 현명하고도 적합한 선택이며,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부터 이 몰래카메라의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시청자들을 웃게 만드는 것이다.
뒤늦게 이 방송을 떠올린 것은 미디어다음 뉴스에서 읽은 불쾌한 기사 때문이다.
버스 성추행범을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
제목은 이렇게 뽑았지만 기사를 다 읽은 분들은 이 기사의 진짜 제목이 '버스 성추행범을 모르는 척하는 남성들'임을 쉽게 알아차리실 것이다.
기자는 몇몇 여성들이 '부모 자식도 없는 놈이다',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공개해라' 하고 말했으므로 친절하게도 그들을 '성추행범을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의 범주'에서 열외시켜주었다. 그런데 기자가 원통하게 느꼈던 그 상황에서 그 흥분섞인 말 몇 마디가 어떤 도움을 주었고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를 묻고 싶다. 뒤짚어 말해 말해, 기자가 그토록 바랐던 것 같은 '몇 마디 말'을 남성들이 해줬다면 뭐가 바뀌었을까 이 말이다.
이 상황의 첫 번째 문제는 성추행을 한 남성이 아무 제지를 받지 않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는 사실이다. 기자의 논리대로라면 남성들의 침묵은 여성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무감각함이 원인이었던 것인데, 반대로 '몇 마디 말'을 해줄 정도로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여성들도 가해 남성이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완력이 남성에 못 미친다는 변명을 듣고자 함이 아니다. 버스에서 내리고 못 내리고는 오직 기사에게 달려있다. 어물어물 도주하려는 상황에서 버스 기사에게 '문 열어주지 말라'는 말쯤은 그 위대한 '몇 마디 말'에 덤으로 해주어도 좋지 않은가.
더 나아가 기자가 눈물 겹도록 고마워 하여 '모르는 척 하는 사람'의 범주에서까지 빼주었던 그 '몇 마디 말'의 깊이조차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실상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는 몇 마디 말은 그저 몇 마디 말일 뿐이다. 오늘도 누리그물 어느 포털 게시판 구석에서는 '누구누구가 RH-B형 혈액이 필요하대요'라는 글을 오로지 정의감으로 붙여넣기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당사자 일방의 기승전결로 끝난 고발글을 읽으며 그 상대방을 '개새끼'라 단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상황을 모르는 채 그저 내뱉은 '몇 마디 말'은 그 자체만으로 절대 선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이 기사를 읽으며 기자가 피해자이고 기자가 주장하는 성추행 사건이 실제로 있었을 개연성이 무척 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당시 버스 안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어땠을지 생각해 보자. 시간은 늦은 밤, 좌석버스라 다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고,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그걸 알려고 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별안간 한 여성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버스 기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한다. 휴대전화로 112에 신고를 하는가 싶더니, 그 가해 남성이라는 사람이 어물어물 내리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피해 여성이 별 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일까, 모르는 사이일까? 정말 성추행을 당한 것일까, 약간 스쳤는데 저 여자가 약간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나서서 '몇 마디 말'을 해 주는 여성들이 대단한 건지는 나는 모르겠다. 나는 남자인 이상, 그런 여성들의 행동이 합리적인 것인지 잘 행동한 것인지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남자인 나는 '가방 절도 몰래카메라'에서 그랬듯이 내가 알지 못하는 한 여성과 내가 알지 못하는 한 남성의 애매모호한 노상 다툼을 보고 있는 것일 뿐이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천박한 시민의식'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인가.(자꾸 '그 상황을 당한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하지 말고, 아무 것도 모르는 제삼자의 입장을 생각해보라.)
기자는 흉기로 위협하는 것만이 위험한 상황이라 생각하는 남성의 편협한 의식을 야속해 했지만, '흉기로 위협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위험상황이기에 형법에서도 긴급피난(자신이나 남이 급박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차이가 있다. 성추행을 당했다는 자신의 말만 믿고, 더욱이 가해 남성이 버스에서 내리기까지 기자 자신도 아무런 조력을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버스의 남성 승객들이 나서서 물리력을 행사해 주길 바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난감한 요구다.
앞에서 말했듯이, 문제의 핵심은 가해 남성이 유유히 버스를 빠져나간 것인데, 이건 버스 기사에게 책임을 물을 일이지, 승객이 '몇 마디 해줬느냐'로 책임을 돌릴 일이 아니다. 이쯤에서 여성들을 성폭력에서 보호하기 위한 여성관련단체의 책무는
'엘리베이터에서 남성들보다 먼저 타기 운동' 따위가 아니라, 이 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실천적 행동요령을 만들어 알리고 숙지시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자가 겪은 성추행과 같이 당사자의 증언 외에는 딱히 범행의 증거가 없고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제삼자가 섣불리 개입했을 때 서로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상황에서는 승객의 완력보다는 피해자인 여성과 버스 기사에게 숙지된 행동요령이 가장 중요하다.(여성단체의 위와 같은 활동이 버스 업체에도 닿아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1. 성추행을 당했을 경우 주위에 들릴 수 있을 정도의 명확한 의사표시로 행동을 제지한다.
2. 지체없이 버스 기사에게 상황을 설명하여 절대 문을 열지 않도록 하고, 가까운 파출소나 경찰서로 향할 것을 부탁한다. 버스 기사가 가까운 파출소나 경찰서를 알지 못하면 112에 전화를 걸어 현재 위치를 설명하고 순찰차를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3. 승객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시간이 지체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아울러 범행을 목격한 승객이 있는지 묻는다.
(버스 기사의 경우, 위 같은 상황에서 피해자의 요청에 즉각 응하거나 피해자가 당황했을시 위와 같은 내용을 알려주는 등의 행동 요령이 될 것이다.)
이것이 피해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이며,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승객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기사로 돌아가, 버스 기사에게 문을 열지 말라는 요청조차 못하고 가만히 있던 기자만 믿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완력을 가해 제압할 사람은 거의 없다. 기껏 억지로 붙잡아 파출소까지 갔더니 피해자라는 여성은 어느 틈에 사라지고 도리어 폭행죄로 고소를 당했다는 푸념이 나오는 게 괜한 이야기가 아니다.
최선의 조치를 마친 다음에 가해 남성이 문을 열어달라고 피해 여성이나 기사를 위협했을 때, 만약 남성들이 수수방관하며 가만히 있었다면 그때는 그 '불의에 대한 침묵'을 비난하는 것이 가하다 인정한다. 경찰서로 가느라 지체되는 것에 항의하는 남성이 있다면 그때는 그 '역지사지 하지 못하는 메마른 시민의식'을 비난하는 것이 가하다 인정한다.
하지만 이 기사는 도대체 뭔가? 애매한 상황 판단의 유보를 '성폭력에 대한 일천한 의식과 비겁함'으로 마음대로 결론지어버렸다. 자신을 성추행했던 남성과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 인한 혐오감밖엔 느껴지지 않는다. 상대를 죽이고 내 살 길을 찾는 이런 방식은 여성과 남성의 편을 가르고 불필요한 적만 양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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