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를 돕기 위해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1817년에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1862년에 죽은 미국의 저술가이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으나 안정된 직업을 갖지 않고 측량일이나 목수일 등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글을 썼다. 1845년 그는 월든(Walden) 호숫가의 숲속에 들어가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구면서 모든 점에서 소박하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2년간에 걸쳐 시도한다. 소로우의 대표작 '월든'은 이 숲 생활의 산물이다.
*** 소로우
생각의 흐름이 같은 바다를 향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행복한 일이다. 내 품에 안겨오는 연인보다도 더한 행복을 준다. 만나지 못해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 혹은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배부름을 느낀다. 왠지 외로워질 때, 서빙고역에서 내려 두란노 경배와 찬양 집회에 참석해 비록 찬양만이 아니더라도 2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그 많은 중고등학생들을 보면서 느끼는 가슴 벅참이랄까....... 그만한 기쁨도 이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생각의 흐름이 같은 이를 알게 됨은 흔치 않은 축복이며 내 소중한 콜라와 같다.
소로우가 그렇게 꼭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그의 잡학이나 잡철학은 현란하기는 하지만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또 책 한 권으로 누군가를 속속들이 아는 척 하는 건 불성실한 일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의 생각의 강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는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시도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지고 있고 그걸로 충분하다. 정말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눈치 챈 분도 있겠지만, 이건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의 말투를 흉내낸 것이다.) 당위를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 놓고 그걸 바라보며 평안해하는 우리들이 더이상 무얼 주문할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지금부턴 내 이야기를 할 차례다.
*** 10월 어느날 밤에
거창하게도, '왜 사느냐'는 이야기에서 출발해야겠다. 중간고사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날 밤, 자정이 가까워왔는데 무척이나 추웠으므로 나와 내 친구는 사실 캠퍼스를 걷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두 시간 가까이 걸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자못 진지한 것이었다.
내 친구는 말했다.
"사는 건 결국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아닐까? 바르게 사는 것 정의롭게 사는 것.....다 좋지. 하지만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 말을 듣고 나는 대답했다.
"정말 우리 삶의 목적이 그런 데 있다면.......그래서 우리가 태어난 거라면..........난 당장 자살하겠어. 난 그런 행복을 찾기 위해 굳이 삶을 꾸려나갈만큼 부지런하지가 못하거든. 이왕이면 안아프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더 좋고......"
글쎄......날 자살옹호론자나 허무주의자로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난 절대 삶의 의의를 '그런' 행복의 추구에 두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쉽게도 여러분이 내 자살 소식을 들을 기회는 없을 것이다.
행복.
행복이 그렇게 무익한 것인가? 아니, 무익한 게 아니라 내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그게 전부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난 행복을 바라보던 종래의 그 미더운 눈길을 거둬들일 때가 되었다고 느끼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느날 나는 갑자기 행복이 소모품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행복이라는 소모품
무엇이 행복인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행복 자체는 종류를 막론하고 단지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무언가를 갈망하며 간절히 바라다가 그것이 어찌어찌 해서 이루어지면 세상을 가진듯이 기쁘다. 더 이상 그 무엇도 필요없을 것 같다. 세상을 가졌으니까.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면 방금 전까지도 내 손을 잡고 함께 펄쩍 펄쩍 뛰던 그 친구는 휑하니 사라지고 없다. 내가 왜 그리도 기뻤던가를 곰곰히 되집어봐도 도저히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그리고 남는 건 또다른 무언가에 대한 욕망 뿐이다.
사람은 행복을 담아둘 자루를 가지고 있지 않다. 행복이란 게 영속하는 실체를 가지고 있다 쳐도 그걸 실체로 담아줄 몸뚱아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 그러므로 행복이 영속하냐 않냐는 의미가 없다. 마치 머리칼이 휘날려 눈을 떠보니 바람은 벌써 저만치 날아가 버린 것처럼. 그럼에도 행복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야 만다. 그리고 그것은 욕망이란 이름으로 남는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았었는데, 그때도 금요일 마다 구역예배가 있어서 이 집 저 집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었다. 그중에 몹시 가난했으므로 전깃불이 아닌 호롱불을 켜놓고 살았던 할머니가 있었다. 그 분은 구역예배를 드릴 때마다 입버릇처럼, '환한 전깃불만 들어와도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몇달 쯤 지나 할머니의 형편이 나아져 형광등을 달게 되었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사람들은 축하하는 한 마디씩을 건넸다. 그러나 몇 주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방이 밝으면 뭐해요. 이 월세방 말고 전세집 하나 얻었으면 참 좋겠는데......."
이 할머니의 행복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결국 행복은 그때 뿐이었고 한낱 소모품이었으므로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행복했었음'으로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더이상 돌이켜 의미있었음을 회상할 수조차 없는 행복이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어제 산 책을 책장에서 꺼내 읽을 수 있듯 어제의 행복도 오늘 다시 느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제의 행복은 어제로서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고 더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확장자의 파일은 load가 안된다.
그렇다면 그 행복이란 것에 도대체 목숨을 거는 이 세대의 모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난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소모품에 이리도 거품을 물면서 달려드는 사람들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소모품 자체에 의미를 두는 건 유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소모품인 종이에 무엇을 쓸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종이를 가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데 왜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런 모습들은 양귀비가 비단을 찢으며 마냥 즐거워했던 것보다 훨씬 하등하다.
*** 별로 TV보고 싶지 않을 때
사는 것은 다 그런 것이라고, 그래서 행복 자체를 인카운팅하는 게 인생의 의미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나는 가끔 방안에 드러누워 그냥 TV를 볼 때가 있다. 무얼 봐야겠다는 목적도 없고 프로그램이 끝나도 그저 다음 프로그램을 연달아 본다. 그 프로그램들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재미있고 즐겁다. 교양적으로 유익한 것도 있다. 한 마디로 나에게 여러 번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그것들이 갖가지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새벽 1시까지 나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어야 하는 건가? 아니, 케이블 TV까지 연결해서 다음 날까지 계속 브라운관을 벗삼아야 하나?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행복하긴 할 것이다.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면 유쾌하게 웃고 떠들며, 슬픈 장면 감동적인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러니 난 틀림없이 행복을 느끼긴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문에 TV를 계속해서 볼 필요는 없는 거다. '호기심천국'을 2시간 모두 보고 여러 번 즐거워 할 수도 있는 거지만, 꼭 그만큼 즐겁지 않아도 되겠으면 10분만 보고 딱 한 번 웃은 다음에라도 나는 전원을 끌 수 있다.
그건 자유다. 행복하긴 해도 굳이 더 누려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없다면 난 미련없이 TV를 끌 것이다. 마찬가지다. 내가 20년을 살아서 여러가지 행복을 누렸지만 만약 나머지 인생도 그런 류의 행복이 으레히 다가올 것이고 그걸 누리는 게 인생이라면, 나는 TV를 끄듯이 미련없이 내 삶을 Off해버릴 수 있는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인생이란 게 그런 행복이 전부고 그 행복이 죄다 순간의 의미에 불과하다면 난 사는 게 너무나 귀찮을 것이다. 피곤하게 그런 인생 살아봐서 뭐하나. 난 그럴만큼 부지런하지가 못하다.
*** 행복 이상의 것
그럼에도 내가 인생을 사는 것은 그속에 '행복'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그딴 소모품 쪼가리 없어도 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딴 쪼가리 없이도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당위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당연할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거지, 그거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행복이 소모품인 것을 알기에 소모품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을 파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법대생들)이 사시합격을 당연한 길로 생각하고 있는 중에도 나는 굳이 그게 나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포커판에서 상대에게 표정을 들켜버린 플레이어나 다름없다. 신발을 사놓고 발을 맞추려 하니 오죽 죽을 맛이겠는가. 혹 맞는 사람이 1년에 몇백명 나올지는 모르겠는데 그 몇십 몇백배의 사람들이 발에 상처를 내고 만다.
난 이상하게도 사시합격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시합격한 다음이 걱정이 된다. 댓가가 컸던만큼 미련도 크기 때문일까? 불의한 청탁과 사사로운 계산에 내 영혼을 팔아먹은 미래의 내 모습이 너무나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그때를 대비해서 기도한다.
사시만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케이스일뿐이지 '사회'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장난이 아닌' 것이다. 카니발이 부르지 않았는가, 사는 게 전쟁이라고. 그 전쟁에서 올바른 플레이를 하려고 난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는 거다.
준비할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목숨을 내놓는 걸로 충분하다. 생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우리가 잃을 수 있는 최후의 것이다.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모든 걸 포기하는 걸 의미한다. 그러니 잃을 게 없는 놈이 못할 게 무엇이며 못견딜 일이 무에가 있단 말인가.
*** 실패한 삶을 그리며
기독교인들은 모두 자신을 해피엔딩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대단도 하다. 주인공이 천 만 명이나 되는 드라마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기독교인 중의 한 명인 나도 이른바 성공 케이스로서 고대 법학과에 입학하면서까지 그리고 이태 정도 지나면서까지 스스로의 인생 행로 중에 '실패'라는 것을 꿈에도 꾸지 않았고, 수능에서 580등을 한 것처럼 실제 삶에서도 내 또래 몇십만 머릿수 중에 최소한 580번째의 부와 580번째의 명예를 차지하리라는 웃기지도 않는 생각에 흠뻑 젖어 있었다.(티는 안냈지만.....)
하지만 왜 다들 실패한 자신의 모습은 부인하려드는지 모르겠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성공적인 삶은 이 세상의 '실패자'의 모습 아니었던가. 내가 그걸 왜 이제서야 깨닫고 인정하게 됐는가 모르겠다.
대학에 들어와서 한참 후에야 나는 그렇게 똑똑한 녀석이 아니며 부지런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치명적인 핸디캡은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건 소모품 쟁탈전에서는 대단히 유용한 아이템일지는 몰라도, 올바로 살고 진짜 기독교적인 성공을 하는데는 단지 '옵션'에 불과하다.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은 당위를 당위로 인정하고 그것을 온몸으로 마실 줄 아는 용기와 참된 것에 대한 갈구,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자세다. 그뿐이다.
난 소위 실패한 삶을 살게 될지 모르겠다. 혹 사시에 붙어서, 아니 사시가 아니더라도 이른바 잘 나가는 직장을 거머쥐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사고방식으로는 아마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승진할까 보단 중앙일보의 모 기자처럼 사표쓸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대자보를 붙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할 아주 한심한 위인이 되어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진짜 돈이 다 떨어져 아내가 '오늘은 촛불을 키고 저녁을 먹도록 해요.'라고 말하게 되는 상황이 올 정도로 비참해 질지도 모르겠다. 내 맘을 몰라주는 자식녀석이 '능력도 없는' 아버지 꼴보기 싫다고 제 방문을 훽 닫아 잠그는 꼴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정말 비참할 것 같다. 정말.....정말..... 비참할 것 같다.
그래서 난 지금부터라도 그런 비참한 꼴에 익숙해지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고, 또 작은 것에서부터 연습하고 있다. 그렇다. 기도랑 연습밖엔 없는 것 같다. 무척 어렵다. 겁도 난다. 하지만 연습을 계속할 거다.
뿐만 아니라 이런 내 생각을 여러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글로 남기는 것도 그런 이유에 들어간다. 다음넷 칼럼방 독자가 일단 80명이니까 적어도 그들에게만큼은 빼도박도 못하게 됐으니 다행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한다. 이러다 앞으로 연애 한 번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고........ 여왕처럼 모셔주겠다는 사람들이 깔렸는데 이건 도대체가 경쟁이 안되니까....... 경쟁이 안되도 어쩔수 엄따. -_-;; 목숨을 버렸다는 놈이 못할게 뭐냐.
모르겠다. 이렇게 사는(엄밀히 말해 계획에 불과하지만....) 게 삶의 당위고 기독교적인 당위인 거 같은데 왜 원칙이 예외같은 세상인지.......모르겠다. 소로우도 당위를 붙들고 살려 애쓰면서, 노예제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면서 고민 많이 했을 거 같다. 암튼, 김동호 목사님 말씀처럼, 나는 두 다리를 땅에 딛고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말할 것이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부패하는 거라고. 그런데 왜 쓸데없는 짓 하냐고. 그러면 난 이렇게 이야기해 줄 것이다.
"넌 니 보고 싶은 TV나 봐라."
(1999.11.11)
명 오늘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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