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까지 해서 안될 일은 없다
98년 9월부터 '새벽나라'에 만화를 싣기 시작했으니까 벌써 1년이 넘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만화를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독학한 것도 아니다. 각종 일간지 해외특약 카툰 가운데 '루리의 세계'라는 것이 있는데, 한 번은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그림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마침 편집부 차장이었기에 주보 한 구석을 땜방으로 채우려는 생각에서 무작정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초창기 내가 그린 만화를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만화에 대한 기초도 없고 뎃생실력도 떨어지는 내가 새벽나라에 만화를 연재하고 있는 건 순전히 엉뚱한 이유에서였다.
나는 워낙이 읽는 걸 좋아한다. 일간신문에서 시작해서 생활정보신문, 학교신문, 잡지, 단행본, 학생회의 전단지까지 닥치는 대로 읽는다. 98년 2월이었다. 그날도 다름없이 길을 걷다 생활정보신문을 하나 뽑아 들었다. 그 1면에 실린 칼럼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칼럼이 삶에 대한 관점에 일대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작은 마을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 청년은 아주 평범한 청년이었다. 집안이 가난해서 대학 진학도 포기한 아주 흔한 청년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그것은 그가 단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뉴욕의 체인점에 취직해 일하는 것이었다.)를 얻기 위해 보여 준 행동은 아주 남다른 것이었다.
우선 마을 우체국으로 달려가 뉴욕 시의 전화번호부를 뒤졌고, 그렇게 해서 찾아낸 무려 수백 개의 체인점에 일일이 구직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연줄도 없고 특이한 경력도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의 그러한 행동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그는 그 편지에 자신이 그 곳에 취직되면 무슨 일이든지 다하겠다고 적었다. 예를 들어 청소 업무나 배달 업무 같은 것이라고 했다. 타자기도 없었던 그는 그 내용마저도 손으로 일일이 써서 보내야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곳에서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회사 사정에 따라 사람을 채용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겠지만, 일언반구의 응답도 없는 그런 경우에 편지를 계속 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편지를 계속 보냈다. 그래도 단 한 번의 답장이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쯤에서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시 달랐다. 이번에는 길도 낯설은 뉴욕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만류하는 부모님을 오히려 설득시키고, 불과 2,3일 정도 묵을 숙박비만을 챙기고 뉴욕으로 향했던 것이다. 드디어 뉴욕에 도착해서 그가 자신이 편지를 보냈던 그 많은 체인점 중에 하나를 찾았을 때, 지점장이 그를 반기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우리 체인점에 393통의 편지를 보냈소. 나는 당신이 언젠가 이 곳을 직접 찾아올 줄 알았소. 당신에게 사무일을 맡기고 싶은데 오늘 오후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겠소?"
그래서 그는 그토록 갈망하던 뉴욕에서의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마침내 지점장의 자리에도 오르게 되었다.
성공학자 노만 필 목사가 전하는 월터 하터라는 미국 청년의 실화 내용이다. 언뜻 보면 우직한 청년의 바보 같은 이야기로 들리지만, 사실 그 바보 행위 속에 성공의 모든 비결이 들어 있으니 놀랍지 않은가?
생각해 보라! 한 회사에 무려 393통의 편지를 쓰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인가? 적어도 몇십 곳에 이만큼 보냈을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놀랍기 그리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강인한 끈기·인내·정성·신념·투지·집념·근성 등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성공의 절대 요소가 아니던가.
자기 회사에 393통의 편지를 써서 보낸 그 열렬한 사람을 회사는 마다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여 얻은 자리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사람도 없다. 따라서 당연히 성공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안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새벽나라
한 회사에 393통을 보냈다............ 그가 10곳에 편지를 보냈다면 3930통의 편지를 쓴 셈이다. 3930통! 솔직히 나였다면 그렇게까지 했을 자신이 없다. 말이 쉽지, 컴퓨터와 프린터도 없던 시절에 4천여통의 편지를 직접 써 보낸다는 것은 미친 짓 아닌가. 몇 통 보내다가 연락이 없으면 자신의 꿈이 뭐였던 간에 일치감치 포기하고 고향에 눌러앉아 솔잎을 먹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글의 제목.... "그렇게까지 해서 안되는 일은 없다"..... 나에겐 충격이었다. 도대체 내가 삶에 임하는 자세는 어떠했던가.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불살랐던가...생각해보면 한심스럽기만 하다. 무엇이 그 청년으로 하여금 그렇게 우둔하리만치 열정적으로 만들었을까? 그건 '꿈'이었다. '희망'이었다. 세상에 '그렇게까지 해서' 안될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즉시 실행에 옮겼다. 좋은 깨달음은 머리로만 썩히고 있어선 안되는 법이라 생각했다. 98년 3월부터 내가 알고 있는 잡자사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이거.....미친 짓 아닌가!)
"워드 프로세서도 없는 그 청년이 3년을 보냈다면 나는 6년은 보낼 자신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그린 그림 중에 그래도 잘 그렸다고 생각되는 그림 몇 개를 수십장 복사했다. 또 짤막한 편지도 썼다. 내 그림 코너를 만들어 주십사고 말이다. 그건 자필로 했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뒷표지에 나와있는 편집부 주소를 옮겨적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여러분이 알만한 곳도 여럿있다. '좋은생각'에도 편지를 보냈다. 그곳은 편집부 기자가 직접 답장을 보내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좋은만남' 같은 곳은 직접 편집장과도 연락이 닿아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내 코너를 만드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밖에도 여러 군데 보냈지만 반응은 - 그 청년과 마찬가지로 -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보냈다. 4000통의 편지를 보내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해 8월 '새벽나라'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찌는 듯 했던 그 토요일 오후를 기억한다. 서빙고역에서 내려 두란노 편집부로 직접 찾아갔고 편집장님과 기자를 만나 코너의 구성과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나를 진짜 만화가 대접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서 9월에 실린 그림이 내가 복사해서 돌렸던 그림,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겨우 6달 만이었다. 월터 하터는 3년 걸렸는데, 나는 6달 밖에 안 걸렸다. 지금은 누구나 달걀을 세울 수 있지만, 처음 달걀을 세운 사람은 단 한 사람이다. 내 그림이 새벽나라에 일 년 넘게 실리고 있는 지금에야 그게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지만 만화를 배운 적도 없는 내가 한 순간의 결심으로 각 잡지사에 편지를 보냈을 그때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스크린톤(만화에서 어두운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붙이는 얇은 필름)'이란 게 있는 지조차 몰라서 검은 색연필로 그림자를 그렸던 그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편지봉투에 넣으며 한숨을 내쉰 적도 있다. '이거 바보짓 하는 건 아닐까?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만화 공부를 하고 지금 나와는 비교도 안되게 잘 그리는 사람들도 쌔고 쌨는데......" 그런 생각 때문에 그만 두었더라면 지금의 추억은 못만들었으리라. 내 자서전도 무척이나 썰렁해졌을 것이고.
***희망의 증거
서진규 씨의 자서전이 베스트셀러라 한다. 난 그 책을 읽어보지는 못 했지만 제목만으로도 감동이 된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나는 이 한 문장을 가지고 200자 원고지 100장 분량의 평론을 쓸 자신이 있다. 그마만큼 이 제목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오늘날의 서진규 씨가 있기 전에 그 누군가가 '가발 공장 여공이 하버드를 나와 이토록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세울 수 있을까' 물었다면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진규 씨는 해냈고 그는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
나는 노구찌 히데요라는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의사출신 세균학자다. 하지만 그의 어린시절은 누구보다도 불우했다. 19세기말 천민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에 교과서를 살 엄두도 못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했다.
선생님에게서 졸업자 명단을 구해 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교과서를 구걸했던 것이다. 당시의 책은 지금처럼 제본이 잘 된 것이 아니어서 노구찌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찢어진 낱장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졸업생들을 찾아다니며 낱장을 모았고 그것들을 풀로 붙여 자신의 교과서를 만들고야 말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바닥을 경험한 사람은 못할 것이 없다." 그는 끝내 동경제대(지금의 동경대)생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의사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야 만다. 희망의 '증거'가 된 것이다.
내게 있어서는 월터 하터라는 청년이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 그 증거가 있었기에 나는 무모해보이는 '짓'을 시작했고 결국 이루고야 말았다. 여기에 그칠 것인가. 그 증거를 마음에 품고 앞으로도 나의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
3년동안 4천여통의 편지...... 이건 내 평생에 하나의 저울로 남아있을 것이다. 3년동안 4천여통의 편지를 쓴 만큼의 실패가 있기 전에 절망하지는 않으리라. 왜냐면 그렇게까지 해서 안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1999.11.24)
명 오늘 
명
PRINT Text
PRINT 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