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서 만든 보안장치를 통과해서, 삼성에서 만든 컴퓨터를 켜고, 삼성에서 만든 전화기로 전화를 받으면서, 삼성에서 만든 마우스로(물론 하청업체 물품에 상표만 붙인거지만), 삼성에서 만든 포털에 접속하여 일을 보고, 삼성 에버랜드에서 공급되는 끼니를 먹으며, 삼성에서 만든 놀이공원에 가서 연말 망년회(혹은 여름휴가)를 즐기고, 삼성에서 만든 보험상품에 가입하고, 삼성에서 만든 에어콘으로 찬바람을 쐬고, 삼성에서 발급해준 법인카드로 결제를 하다 보면 코메디라는 생각도 가끔씩 드는건 사실이다. - 레몬젤로 님의
'삼성이 섬뜩한 이유'
중에서 (미디어다음 아고라)
IMF 구제금융 체제가 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재계에는 '그룹'이라는 개념이 흔했다. 구제금융을 거치며 그룹의 문어발식 경영 행태가 지탄을 받았고, 때맞추어 출범한 국민의 정부의 초반 경제정책은 주로 이들 그룹를 해체시키고 업종별로 통폐합 - 이른바 '빅딜' - 하는 데에 촛점이 맞추어졌다. 그런데 문어발식 경영은 왜 나쁜가?
문어발식 경영은 다른 말로 '선단식 경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명칭은 2차대전 당시 미국과 독일의 치열한 해상전에서 유래한다. 참전을 선언한 미국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본토로부터 유럽 현지로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일이었다.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독일은 그 유명한 유보트 함대를 이미 대서양에 배치한 상태였고, 사흘이 멀다하고 미 수송선은 유보트의 어뢰에 격침되기 일쑤였다.
그러자 미국이 선택한 방법이 '선단(船團)'을 꾸리는 것이었다. 수송선을 단발적으로 띄우기 보다는 여러 척을 한꺼번에 출발시켜 한두 척을 희생하더라도 나머지 배를 살리는 방법으로 위험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수송선들 주위로 대함 및 대잠 전투능력을 가진 구축함을 배치하여 독일 유보트의 공격에 대비하게 했다. 당시만 해도 잠수함의 잠항능력이 형편 없던 탓에 적함 한 척을 겨냥하여 어뢰를 쏘고 빠지는 것이 전투패턴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미국의 선단 편성은 단수로 활동했던 유보트들에게 거의 치명타를 날렸다.
그렇다면 '선단식 경영'은 좋은 의미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경제계에서 집중하는 의미는 다른 곳에 있으니, 바로
'선단의 최고속도는 선단에 편성된 배 중에서 가장 느린 배의 속도'가 된다는 점이다. 선단이라는 대형을 유지해야하기에 제 아무리 날랜 속도의 구축함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가장 느린 수송선의 속도에 맞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시당초 유보트로부터 수송선을 보호하는 목적으로 선단이 꾸려졌으므로 이것은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경제계의 '선단식 경영'은 그렇지가 않다. 구축함(잘 나가는 계열사)이 수송선(신통치 않은 계열사)을 보호할 필요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유를 해보면 어떨까. 작은배 1척은 한 달이 걸리는 한 번의 항해에서 20원의 이익을 남기고, 큰배 1척은 15일이 걸리는 항해에서 100원의 이익을 남긴다. 작은배의 속도는 큰배의 1/2이다. 작은배는 한 번 항해시 선단이 10척 이상일 경우 10척당 2척꼴로, 10척 미만일 경우 10척당 4척꼴로 침몰한다.(큰배와 작은배의 교역 물품은 서로 다르며, 침몰한 작은배 1척을 보충하기 위해 40원이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이런 조건에서 A국가가 큰배 2척, B국가가 작은배 10척을 보유하고 있다면 이들 국가가 한 달동안 올리는 수익은 각각 다음과 같다.
A국가
- 큰배 2척 X 항해횟수 2회 X 1회 이익 100원 = 400원
B국가
- 작은배 10척 X 항해횟수 1회 X 1회 이익 20원 - 선박 보충(2척) 80원 = 120원
무역이 반복되면서 B국가의 운용 노하우도 늘 것이고 침몰 선박도 줄어들어 이익은 점차 증가할 것이다. 증가한 이익을 바탕으로 작은배 숫자를 더 늘려 선단을 키운다면 침몰 선박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A국가가 작은배를 이용한 무역에도 뛰어들 것을 선언하며 5척의 작은배를 구입한다. A국가의 물량으로 인해 작은배의 이익이 15원으로 줄었다고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A국가
- 큰배 2척 X 항해횟수 2회 X 1회 이익 100원 = 400원
- 작은배 5척 X 항해횟수 1회 X 1회 이익 15원 - 선박 보충(2척) 80원 = -5원
B국가
- 작은배 10척 X 항해횟수 1회 X 1회 이익 15원 - 선박 보충(2척) 80원 = 70원
이대로 간다면 A국가의 작은배 선단은 계속해서 적자를 볼 것이고, 자연히 작은배를 이용한 교역을 포기(도태)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A국가로서는 큰배를 이용한 교역에, B국가는 작은배를 이용한 교역에 집중하여 선박 숫자를 늘려가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
문제는 A국가가 작은배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큰배와 작은배를 같은 선단에 편성시켜버리는 경우에 발생한다. 큰배가 자신보다 두 배나 느린 작은배에 속도를 맞춰야 하는 우스운 꼴이 된 것이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A국가
- 큰배 2척 X 항해횟수 1회 X 1회 이익 100원 = 200원
- 작은배 5척 X 항해횟수 1회 X 1회 이익 15원 = 75원
B국가
- 작은배 10척 X 항해횟수 1회 X 1회 이익 15원 - 선박 보충(2척) 80원 = 70원
신규 런칭한 '작은배를 이용한 교역'에서 수익이 발생하자 이에 고무된 A국가는 작은배 15척을 추가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시장 여건이 급격히 악화되고 작은배의 수익은 7원으로 떨어진다.
A국가
- 큰배 2척 X 항해횟수 1회 X 1회 이익 100원 = 200원
- 작은배 20척 X 항해횟수 1회 X 1회 이익 7원 = 140원
B국가
- 작은배 10척 X 항해횟수 1회 X 1회 이익 7원 - 선박 보충(2척) 80원 = -10원
이제 거꾸로 B국가가 적자를 보게 되고 끝내 교역을 포기하고 만다. 작은배 교역에서 A국가가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자 가격이 다시 안정된다.
A국가
- 큰배 2척 X 항해횟수 1회 X 1회 이익 100원 = 200원
- 작은배 20척 X 항해횟수 1회 X 1회 이익 20원 = 400원
B국가
- 없음
맨처음 400원의 수익을 얻던 A국가는 작은배 교역 참가후 600원으로 수익이 늘어난 것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며 기뻐한다.
"시장의 승리다!"
정말 그럴까? 만약 A국가가 작은배 교역에 뛰어들지 않고 그 여력으로 큰배 교역을 더욱 보강했으면 훨씬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은배 교역시장에 눈을 돌렸고 그 결과 미미한 수익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B국가의 경제를 초토화시킨 댓가인 동시에 자국의 큰배 교역을 무력화시키는 희생의 결과였다.
지탄을 받아온 그룹들은 하나 둘 해체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도 큰 얼개에 있어 달라진 건 전혀 없어 보인다. 예전에 '삼성그룹 계열사'였던 회사가 '삼성 계열사'가 되고, '현대그룹 계열사'가 '현대 계열사'로, '롯데그룹 계열사'는 '롯데 계열사'로 불리우는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규제가 강화되었다고 하지만 법의 단속이 미치지 않는 그늘에서 계열사들은 내부자 거래를 일삼으며 변칙적이고 부적정한 책임자본 훼손이 횡행한 가운데, '그룹'아닌 '그룹'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리고 그들의 행태는 여전히 선단식 경영에 머물러 있다. 처음에 인용한 글을 쓴 사람도 지적했듯이, '중소기업도 충분히 잘 만들 수 있는 제품을 한국 최고의 기업이 굳이 만들 필요는 없'음에도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계열사를 수없이 늘려가며 잠재적 생산성을 소진하는데 골몰한다. 모든 것이 '삼성'으로 도배된 한반도의 모습이 개운치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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