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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6학년 때 학급마다 반장과 부반장을 머리에 두고 부서조직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학습부', '체육부', '환경부', '오락부' 같은 것들이었다. 이름만 거창했지 실지로 하는 일은 없었던 부서들인데 유일하게 하나, 한 달에 한 번 부서 신문을 만들어 교실 뒤편에 전시를 해두어야 했다. 그러니까 부서의 탈을 쓴 학급신문 제작팀들이었던 셈이다. 내가 장으로 있던 학습부는 이달엔 이 부원 집, 저달엔 저 부원 집 하는 식으로 모여서는 전지 크기 흰 종이에 이런 저런 내용을 채워 넣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제가 생겼다. 글씨가 예뻐서 전지 위에 필사하는 일을 주로 했던 K가 모임 당일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그 녀석을 찾아가 참석의 당위성을 설파(?)했고 결국 신문도 잘 만들어져 한 달을 잘 마무리 하는 듯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학습부 여자 아이 셋이 나를 찾아와 눈에 칼을 세우고 말했다. "흐응... 알았어. 우린 앞으로 신문 안 만들면 되잖아!"
영문도 모른채 나는 거의 울상이 되어선 체육시간 내내 화단에 쭈그리고 앉아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머리를 쥐어 뜯었으나 기억날리가 있나. 이를 불쌍히 여긴 학습부원 J는 아무도 모르게 나를 찾아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K 찾아가서 니가 그런 말 했다며. K는 글씨가 이쁘니 꼭 참석해야 한다고. 다른 아이들은 글씨 엉망이라고. K한테 직접 들은 내용이야."
낭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저 K를 칭찬해 마음을 떠볼 심산이었고 다른 아이들이 글씨가 이쁜지 엉망인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다만 이런 뜻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던 내가 죄인이었다. 나중엔 서로 화해하고 해당 3인에게 학습신문 제작의 전권을 쥐어주다시피 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지만, 내가 K에게 했다는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그 말과 그 말의 파급력이 몰고 온 사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15년이 지났지만 국민학생 때의 교훈이 무언가 반성과 교정의 성과를 이루지는 못한 것 같다. 그때의 내가 말로 실수를 했듯 지금의 나도 말과 글로 실수를 하고 다닌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별하고 비록 해야 할 말이라 할지라도 무엇에 촛점을 맞추어야 하는지 그 강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의 이면적 반사적 의미가 나로선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위험은 없는지 늘 고려하고 살펴야 하건만 현실에선 늘 망각의 강물이 넘쳐흐른다. 어찌보면 나 같이 아둔한 사람이 그 모든 체크리스트를 다 살피고 넘어가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차라리 벙어리가 되어 사는 것이 가장 완벽한 해결책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우리가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내가 이 수를 두면 상대는 저 수로 나오리라는 것을 대강으로 짐작한다. 내 선택, 나의 움직임에 따라 상대의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이내 후회하기 시작한다. "아, 저걸 저기에 두면 안되는 건데...." 말도 마찬가지다. 이 말을 하느냐 저 말을 하느냐, 지금 하느냐 나중에 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대답이 달라지고 생각이 바뀐다. 쏟아져 나오는 화술과 협상력에 관한 책들도 결국 이 문제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말하는 방법에 대한 교훈은 학습하기에는 방대하고 실천하기에는 추상적이다. 더하여, 말을 하는 속도와 반응시간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할 여유를 줄 만큼 느리지 않다. 게임에서 제한시간을 두고 벌칙을 주는 것처럼 정형적이진 않지만, 대화가 오가는 자리에서 상대방의 말과 내 말을 필기하며 그 의미와 가능성을 곰곰히 따지는 시간을 줄 사람은 없다.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하고 느린 분석속도를 익살 맞게 찌르는 것은 그야말로 게임에서뿐이다.
그런 탓에 우리가 말을 하는 시간에 처리해야 할 정보와 출력해야할 판단의 총량은 늘 과포화 상태다. 성경 한 구절을 놓고 수십 줄의 주석을 써내려 갈 만큼의 직관도 부족하며 그 직관을 축적할 시간 자체가 절대 부족한 상태인 것이다. 단 한 줄의 광고를 위해 머리를 싸매는 카피라이터나 축약된 시어에 자신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고자 하는 시인들은 오로지 직관을 위해 시간을 전적으로 희생한 극단적 예일뿐, 일상의 우리는 그 직관과 경도된 시간의 선분 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백 문항짜리 적성검사나 인성검사 문제지와 같다. 쉽게 답할 수 있지만 다음에도 똑같이 답을 하리라 확신할 수 없다. 답이라 믿게 만드는 유일한 기제는 검사문항을 읽는 순간의 당신, 당신 존재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답의 총합이 당신이라는 존재를 징표한다. 바꿔 말하자면, 말을 하는 순간에 얼마만큼의 직관이 가미되었든, 또는 얼마나 부주의하게 내뱉었든, 그 말의 총합이 곧 우리 존재의 평균점이며 우리 존재의 징표가 된다는 얘기다.
자료보관용으로 사용하는 네이버 블로그에서, 퍼온 자료를 등록하는 분류 이름을 나는 '주워온 보물들'이라는 이름으로 정했다. 그런데 일전 김윤아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우연히 들렀던 한 블로그의 주인은 퍼온 자료들을 '감사히 얻다'라는 이름으로 분류한 것을 보게 되었다. 두 표현의 차이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엔 부족하지만, 적어도 어떤 이는 '감사히 얻어왔다'고 생각하는 자료들을 나는 다만 '주워오는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시간적 한계선상에서 직관이 생략된 채 출력되는 말의 개인차다. 그 개인차가 개개인의 존재의 차이를 반영한다.
허풍쟁이는 자신이 허풍쟁이임을 감추기 위해 갖은 치장을 해도 완전히 감출 수가 없다. 말에서 그 속성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나쁜 버릇을 가진 사람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불편한 뉘앙스가 풍긴다. 잘난 척 하는 사람은 아무리 겸손해 보이는 말을 하려해도 대화를 나눠보면 '나 잘난 것 좀 알아줘!'하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이것이 '말의 향기'다. 생선을 종이로 감싸도 비린내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존재의 징표를 모조리 도말하기 위해 정보를 처리하고 완벽한 판단을 내리기엔 역부족이다.
운동선수는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우리가 경기장에서 보는 것의 수십배나 혹독하게 스스로를 단련한다. 경기장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그가 쏟아온 땀의 극히 일부분이다. 그리고 일부분에 불과한 그 경기내용이 그 선수의 모든 것을 징표한다. 말을 할 때 그 자리에서 모든 내용을 통제하는 것이 힘들다면 말하는 분량의 몇 배 몇십 배에 해당하는 독서와 사고가 앞서야 한다. 날아오는 공의 구질과 그 공을 쳐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온갖 지식이 머리에 충분할지라도 그것은 배팅 순간에 종합되어 출력되기에 너무나 방대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선수는 그 모든 교훈을 몸으로 이해하기 위해 수천번의 배팅을 하는 것이다. 결국 말로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말을 내뱉는 나 자신을 깎고 다듬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말에서 풍기는 향기가 곧 그 사람의 향기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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