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를 두는 사람 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그럴듯한 훈수를 두는 것이 가능하다. 훈수자는 진행되는 판 자체에 함몰되어 있지 않으므로 장기를 두는 사람이 놓치는 수들을 쉽사리 읽어낸다. 응당 테스트 과정을 거치는 작업 과정도 비슷한 이유에서 의미를 갖는다. 자신이 만든 코드 몇 줄이라도 스스로가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베타 테스터를 구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입장과 전혀 분리된 객관적인 상황에서 바라보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는 것이야말로 그 작업물을 제대로 검증해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들어 인식하는 것들이 손실없이 머리속에 입력되지 않는다는 데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 또한 입력된 자료마저 구분되고 추상화된 개론에 지나지 않아, 알고 있는 사실과 그 사실을 적용할 대상과의 꼭 맞는 접점을 찾기 힘든 데에 또다른 이유가 있다. '문제집'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알고 있다,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그 유효함과 적절함을 반복 확인하는 것이 우리 학습의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소위 '스터디 그룹'을 좋은 학습 방법으로 권장하는 것도 그 한 예다. 장기판에 함몰되어 미처 보지 못하고 있을 때, 더이상 수를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훈수자가 한 마디 던지듯이, 스터디 멤버가 묻는 질문 하나 하나로 인해 아직 내가 그것에 대해 완벽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배우는 것이다.
드라마 <허준>의 허준은 학습의 한 유형으로서의 시험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의서의 문언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가며 다분히 사변적인 의술을 신봉하는 유도지에게 유의태는 이렇게 말한다. "의서라고 해서 모든 것을 기록하지는 못하는 법이고 사람마다 다른 체질과 기후에 따라 의원이 재량껏 처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의서는 병증을 묘사한 것이지 그 자체가 100퍼센트 완벽한 실체의 반영이 될 수 없었다. 허준은 비록 유도지만큼 많은 의서를 탐독하지는 못했으나, 이론의 바탕이 되는 수많은 임상 경험이 있었다. 허준이 만나 본 수많은 환자들은 비록 그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들이었음에도 불구, 병증의 표면을 핥은 문자들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가를 쉴새없이 되묻는 시험문제였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험은 '상대를 평가의 객체로 전락시키며 서열화를 조장한다'는 부정적 이면에 앞서 학습의 또다른 진작책으로 인정될 수 있다. (참조 :
올바른 평가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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