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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권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진보적'이라 칭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임신과 태아가 자발적 예속을 가져오고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부조리한 구조를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 그들의 시각이다. 이런 전제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부조리한 구조를 깨기 위해 다른 사람(태아)의 권리(생존권)를 박탈하는 수단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그들은 낙태권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지적에 쉽사리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낙태권의 전제 속에는 '태아에 대한 처분권(Mein Bauch gehort mir)'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낙태권을 하나의 처분권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수정체와 태아의 구분 시점이 명확치 않음을 들어 항변한다. 하지만 마찬가지의 논리로, 태아와 영아 간에 구분 시점 또한 명확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태아가 한낱 처분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가장 큰 여건은, 태아가 생존권의 박탈 기로에서도 도무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절대적 약자라는 점이다. 적출될지언정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 태아는 그야말로 손등에 난 사마귀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처분권 발상의 시작은 거기부터다.
절대적 약자인 태아에 대한 처분권을 인정한다면 머지않아 상대적 약자인 영아에 대한 처분권으로 확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유'와 '권리'의 이름으로 '스스로 보호할 힘 없는 권리'의 영역을 야금야금 침식해 들어갈 것이다.
(원치 않는 임신, 육아와 노동 등의 문제에서 정부와 사회의 책임유기가 비난 받아 마땅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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