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님의 코멘트를 읽고 시민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듯 해 몇 가지 정리해 드립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의결할 때 소추내용으로 적시한 것은 다음 세 가지 입니다.
첫째, 경제파탄 및 국정혼란의 책임, 둘째, 측근비리와 부정부패 책임, 셋째, 선거법 위반에 대한 책임입니다. 헌법재판소는 여론이나 정치적 고려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기관이 아닙니다. 헌법을 기준으로 제기된 소를 심리하고 그에 따른 가장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겁니다.
(언론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썰을 풀더군요. 기사를 읽으실 때 가볍게 비웃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 법리를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 경제파탄 및 국정혼란의 책임
경제파탄이나 국정혼란에 대하여는 위법성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과거 김영삼 씨가 대통령 재직 당시, IMF 체제를 불러온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으나 결국 정치적 행위나
정책적 결정의 결과에 따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결론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명백한 고의를 가지고 국가에 중대한 위해가 되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의 경우가 아니라면 고려될 여지가 없습니다.
2) 측근비리와 부정부패 책임
탄핵은
대통령을 당사자로 하는 징계처분의 성격을 띱니다. 대통령이 측근들의 비리에 개입되어 불법행위에 동참하거나 지시하지 않은 이상, 측근의 비리를 이유로 대통령이 탄핵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노 대통령이 실제로 그와 같은 불법에 개입된 것으로 수사가 종결될 경우, 그때에는 따로이 탄핵소추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선거법 위반
가) 선거법 위반 불인정의 입장 - 일단 공무원의 선거중립의무를 규정한
선거법 9조의 적용 대상에는 정무직이자 선출직 공무원인 대통령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정당정치 내지는 정당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그 정당주의를 기반으로 대통령이 선출되므로 여타의 공무원과는 달리 대통령의 당적보유와 당정활동을 막지 않고 있습니다. 직무수행상 엄격한 중립이 요구되는 선관위/법원 공무원에게는 당적보유를 허용하지 않도록 법률로 명시하고 있는 부분과 구별되는 내용입니다.
만약 대통령이 국가공무원(행정권)을 동원하여 유무형의 선거지원에 나선다면 선거법 60조 각호에 규정에 위반되며, 명백히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로 간주, 탄핵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그간의 발언을 종합해볼 때, 사실상의 당적을 둔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사실을 분명히 하고, 정세에 대한 의견을 여권내부에서 혹은 사적으로 밝힌 것에 불과하므로 선거법 위반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나) 선거법 위반 인정의 입장 - 백번을 양보하여 국참이나 리멤버 집회에서의 발언을 사전선거운동으로 보고 위법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역시 탄핵소추 가결이 타당하다 보기엔 어렵습니다. 헌법이 천명한 법치주의의 바탕에는 비례성의 원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행정법에서 흔히 드는 비례성의 원칙에 관한 금언으로서,
"참새를 잡기 위해 대포를 쏘지는 않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속담 중에는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처분이나 수단은 그 목적을 추구하는 이유에 맞게 선별되어야 하고, 그것을 법학에서는 '합목적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선거법 위반에 대한 처분으로 탄핵을 말하는 것은 이 비례성의 원칙을 도외시한 것이고 탄핵심판제도의 존치 이유를 깡그리 무시한 비합목적적인 결정입니다.
아시다시피 헌법 84조에 따르면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가 아닌 이상, 대통령은 임기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살인을 하더라도 형법규정을 들어 직을 파하고 대통령을 처벌할 수는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부당해 보이기까지 한 규정은 헌법이 우리나라의 국가체제상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의 지위를 그만큼 중요히 여기고 있고, 국정연속의 중요성에 막대한 무게를 두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대목입니다. 그러할진대, 위반시
최고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4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도록 하는 정도의 가벌성을 가진 선거법을 위반하였다고 해서 대통령의 직을 파하도록 하는 것은, 마치 교통신호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탄핵하겠다는 발상만큼이나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헌법 65조 '대통령의 직무집행에 있어 헌법, 법률을 위반한 때 탄핵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라는 문언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여 '경미하든 말든, 위반했으니 탄핵한다'는 논리로 일관하는 것은 그야말로 법역사상으로도 한참 전에 사라진 '법실증주의학파'의 21세기에서의 재현이라고 밖엔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맹목적 법해석에 따르자면, 이론적으로 이런 시나리오까지 가능합니다. 17대국회가 한나라/민주/자민련의 압승으로 구성된 다음, 6개월마다 대통령의 개별 발언 하나하나에 탄핵소추를 의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최장 6개월씩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될 것이고 헌법재판소의 판결과는 무관하게 최고 4년 6개월(국회의원 임기+임기종료직전 소추) 동안 대통령을 대통령이 아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즉 법실증주의적 해석이 '탄핵심판'이라는 헌법수호 수단을 야당의 사적무기로 변질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덧붙여, 탄핵소추시 자동적으로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칠레, 멕시코 정도 뿐입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 미국만 해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 사건으로 탄핵소추를 받았을 때도 그의 직무수행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때, 탄핵소추시 자동적인 직무정지를 명시한 우리 헌법은 그 탄핵소추가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키지 않고서는 국가의 안위에 큰 위협이 된다거나 국민주권주의의에 전폭적으로 반하는 중대한 사유가 있을시에만 가결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총선을 재신임과 연계시키겠다는 발언을 추가하여 소추내용을 보강하면 된다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법을 모르면 좀 가만히 계셨으면 하는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과거 재신임 국민투표 카드를 들고 나왔을 때 헌법재판소는 '발생하지 않은 사안에 대하여는 위헌성을 판단할 수 없다'며 각하결정을 내렸습니다. 판단대상이 부재한 기본적인 절차 흠결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번 총선연계 발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신임과 연계하겠다는 의도는 결국 대통령 혼자의 결심이며 그것에 대하여 어떠한 국가작용이나 행정력의 발동이 없으므로 따라서 당연 각하 사유가 됩니다. 프랑스에서도 한 법안의 통과를 걸고 드골 대통령이 자신의 재신임 여부로 간주하겠다고 발언을 했고, 국민이 해당 법안을 부결시키자 사임하고 맙니다.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할 경우 노무현 대통령의 진퇴여부는 그가 스스로 결정할 것이고 그에 대해 국민이 정치적인 비난을 보낼수는 있을지언정 헌법적 심판의 대상이 되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재신임 연계발언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있으므로 사전예방적 탄핵이라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시는데, 웃었습니다. ^^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너무 심취하셨나 봅니다. 그러면 대통령도 사전 예방적으로 국회를 해산시킬 수 있겠군요.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잘못하면 사전예방적 살인죄나 사전예방적 절도죄로 체포될 수 있습니다. ㅎㅎㅎ
제가 일관되게 탄핵찬성론자들이
개인의 호불호에 따른 증오감을 탄핵법리에 덧씌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위와 같은 사실에 기인합니다. 국회의원 193명이 탄핵사유가 된다고 말하고, 몇개 중앙일간지가 탄핵사유가 된다고 말하고, 일부 극우 논객이 탄핵사유가 된다고 말한다고 해서, 헌법상의 탄핵제도의 취지가 바뀌는 것도 아니며 적용범위가 바뀌는 것도 아니며 법리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노 대통령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야당이 그것을 빌미삼아 탄핵을 주장할 수 없다는 말씀도 국민감정의 차원에서 수긍이 갑니다만, 저들은 자꾸만 그점을 꼬투리 잡아, 그 과오로 인해 탄핵할 수 있다고 호도합니다. 하지만 길게 설명한 것처럼
이번 사안은 탄핵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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