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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해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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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폭력으로 원인을 몰아가는 흐름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자 군 당국은 최초의 브리핑에서
'언어 폭력'이 범행의 원인이었다는 가해자 김 일병의 진술을 그대로 전했다. 이후에 있은 브리핑에서도 '우발적'이라는 표현을 '계획적'으로 바꾸었을 뿐, 김 일병의 범행에 선임병들의 언어 폭력이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라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다수 언론은 병영내 인권 문제를 일제히 성토하고 나섰고 적지 않은 누리꾼들도 그에 공감하는 기색이다. 향후 시민단체들의 호응과 주문이 더하여져 이 사건의 해법은 '언어 폭력' 일소를 기치로 내걸고 '병영 인권 보호' 따위로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이야기인가. 수류탄과 기관단총을 손에 쥔 마치광이의 발광에 억울한 생을 마감한 여덟 젊은이들을 원인제공자이자 또다른 가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이 이상한 흐름 말이다. '언어 폭력'이라는 표현부터 문제가 있다. 용어 선정도 신중해야 한다. '언어 폭력'이라는 단어는 '구타'나 '가혹행위'의 또다른 모습을 연상케 한다. 숱하게 들려오는 일이병들의 자살 사건에서 느끼는 것처럼,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동정심과 함께, 그만큼 선임병들이 김 일병에게 부조리한 처신을 했을 것이라는 유추를 조장한다.
무책임한 언론들이 '쓰레기 만두'라는 절묘한 표현을 창안한 결과 만두업계 전반에 직격탄을 날리고 오랜 기간 공황 상태로 몰고 갔던 것처럼, '언어 폭력'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지 못하고 가해자 김 일병의 주장만을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김 일병이 주장하는 언어 폭력이란
과연 김 일병이 주장하는 '언어 폭력'이란 것이 구타나 가혹행위 같은 비인간적이고도 악한 성질의 것이었을까. 일단 김 일병 스스로도 인정하고 다른 소대원들도 증언하듯이, 사건이 발생한 GP 병사들 간에는 구타나 가혹행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구타도 아니고 가혹행위도 아니고 그 '언어 폭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심각했길래 총기 난사로 보복을 했단 말인가? 김 일병의 주장에 따라 원인제공자로 치부되는 선임병들의 진술은 객관성을 위해 제외하기로 하자. 마찬가지 이유로 김 일병의 - '언어 폭력'을 당했다는 - 진술도 무시하기로 하자.
이들을 심문하고 조사했을 군 당국은 더더욱 믿을 수 없다. 간부, 특히 장교들이 '사병들의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은 전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만 이해한다. 사병들은 일이등병과 상병, 병장들 간에도 지휘채계가 엄존하며 엄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간부들은 이등병이나 병장이나 그저 머릿수를 채우는 병력 중 1명으로 본다. 사병에게 있어 계급이란 월급을 얼마 줄지 구분하는 서류상의 차이일뿐 미군의 Private, Corporal, Sergeant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심지어, 분대원들에 대한 지휘권을 갖는 분대장조차도 간부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따까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병들과 비슷한 기간을 군대에 있다 나가는 단기 복무 장교, 부사관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사병들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간부들이 진상을 규명한답시고 백날 심문을 해봤자, 결국엔 그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된다. 간부들이란 사병들이 '슬쩍 밀더라'고 말한 것도 '한 대 치더라'로 새겨 듣는 위인들이다.
츄리닝 - 소원수리
이런 형편이기에 가장 객관적인 것은 전역자들의 증언이다. 츄리닝중 이런 그림을 보면서 단순한 개그적 소재일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엄연히 사실인 내용이다. 자신들에게 물을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기간 선임병이나 그들로부터의 후폭풍을 두려워하는 후임병들과는 달리, 전역자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상황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그들의 입에서 상당히 객관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뒤에 남을 사람들을 배려해서 굳이 말을 꺼내지 않을 뿐이지, 무엇이 사실인가를 들으려고 한다면 전역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실제로 전역 신고를 하는 아침에 중대장 또는 대대장과 짧은 면담을 갖기도 하는데, 이 자리에서 후임병들의 문제점은 이렇고 선임병들의 문제는 저렇고 고쳐야 할 사병들간의 악습이라든지 간부들에게 어떤 악감정을 갖고 있는가 등을 미주알 고주알 말하고 나가는 사람도 없지 않다.(이런 것을 가리켜 '고춧가루 뿌리고 나간다'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나는 해당 중대의
최근 전역자가 '김 일병이 속한 소대는 분위기가 좋았고 선임병들도 성격이 좋은 편이어서 후임병들을 잘 챙겨주었다'라고 증언한 것이 가해자인 김 일병의 진술보다 100 배는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사망자 중 이건욱 상병이 문제의 김 일병과 함께 휴가를 나왔을 때 그를 호프집에 데려가 술을 사주며 군생활을 위로하고 자신의 집에서 잠까지 재웠다는 대목에서는 그 소대의 진짜 상황이 어떠했는지 거의 확신하게 된다.
그렇다면 김 일병이 당했다고 주장하는 '언어 폭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군대라는 조직의 맥락에서 생각할 것
많은 사람들이 언론에서 만들어낸 '언어 폭력'이라는 창의성 있는 표현에 경도되어 곧바로 인권 문제로 결부시켜 버리지만, (늑호 님이 지적한 것처럼) 군대는 전쟁 준비와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소비하도록 구성된 매우 특수한 집단이다. 일반적인 부분 사회에서 비이성적이라 평가되는 내용도 그 특수성 안에서 이성을 넘어 당위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실화이자 미디어로 남아 있는 예로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 장면이나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포이 진격 장면을 감상해 보라. '미스터 앤드 미세스 스미스'에서 피트와 졸리가 사주 개방된 홀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수십 명의 요원들을 거의 쇼를 연출하며 해치우는 동안 단 한 발의 총알도 맞지 않고 살아나는 것은 그야말로 웃자고 만든 장면이다. 실제 전장에서 총을 든 병사의 목숨이란 메딕을 대동하고 포진한 마린과 파이어뱃을 향해 달려가는 저글링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생명의 존귀함을 생각하면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략적 필요에 따라 중대원, 아니 대대원 절반을 죽여서라도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는 판단이 선다면 지휘관들은 '돌격 앞으로!'를 외치게 되어 있다. 참호 넘어로 뻔히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뛰어나가 총알받이가 되어주는 것, 그게 병사들이 하는 일이자 병사들의 유일한 생존 가치다.
그것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이 미친 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주저없이 미친 짓을 수행하는 것, 그 수행이 가능하도록 지속적으로 훈련받고 세뇌당하는 곳이 군대다. 군대의 지휘체계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군형법이 일반 형법보다 가혹하고 즉각적인 이유를 깊이 생각해보라. 거기서도 평등권을 들먹이며 부당성을 논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없이 감상적으로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는 인식 수준으로 '인권' 이야기를 하고 보는 것은, '노조 절대선주의(絶對善主義)'나 '좌파 절대선주의(絶對善主義)'만큼이나 순진하고 몽매하고 무책임하다.
'언어 폭력'이라는 가치경도된 단어를 떠나 생각해 보자. 군대는 엄마가 영원한 이등병으로 취급받는 일반 가정과 다르다. 집에서는 밥을 먹고 곧바로 TV 앞에 달려가도 엄마가 알아서 그릇을 치워주는 풍경이 용인될지 몰라도, 군대에서는 모든 책임이 구성원들에게 나눠져 있다. 내가 맡은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고 다른 구성원이 엄마처럼 뒷치닥거리를 해주지 않는다.
나는 입대전에 학교앞에 있는 호프집에서 몇 개월간 알바를 했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알바들 중에 나랑 동갑인 녀석이 있었는데, 나랑은 반대로 그는 제대후 복학을 준비하는 중이었고 이미 몇 달 경력이 있었다. 나는 일하고 나서 처음 두어 주 동안 지각이 잦았다.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생활이 익숙치 않아 제 시간에 깨지 못해 20~30분씩 늦곤 했던 것이다. 너그러운 성품인 매니저님은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지각이 반복되자 그 동갑내기 친구가 나를 뒤로 불러내 호되게 질책했다. '너 늦게 나와서 시급 깎이는 거야 알 바 아니지만, 왜 똑같은 시급을 받는 우리(다른 알바)가 늦게 오는 네 몫까지 고생하며 일해야 하느냐'라는 게 요지였다. 학교 선생도 아니고 부모님도 아니고, 말 놓고 지내는 친구한테서 그렇게 자존심이 구겨질 정도로 심하게 욕을 먹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들으면서도 응당 내가 잘못한 행동에 대해 야단을 맞는 것이었기에 도리어 개념이 분명한 그 친구의 당당함에 탄복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따끔하게 혼이 난 그후로는 두 번 다시 지각을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군대에서의 소위
'갈굼'이란 것도 크게는 이런 '호된 질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정말로 부대 운영과는 무관한 구타나 가혹행위가 있지 않은 이상, 군대에서 오가는 험한 말은 당사자가 부대를 원활하게 돌아가는데 도움이 되느냐, 방해가 되느냐에 달려 있다. 웃긴 건 이런 갈굼이 마치 군대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말들을 하지만, 그 좋은
'싸제(사회)'에선 이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아무개 기업 아무개 팀에서 아무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아무개 대리에게 프리젠테이션을 맡겼다. 몇날 며칠을 기한으로 주었는데 막상 당일에 이르러서 그가 '아차, 깜빡했어요' 한다면 입에서 욕이 안 나오겠는가. '그 따위로 하려면 때려쳐' 소리가 안 나오겠는가 말이다. 제 행동에 따라 칭찬을 듣는 것도 마땅한 것이고 질책을 듣는 것도 마땅한 일이건만,
오로지 군대에서 듣는 소리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부조리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궤변과 다르지 않다.
군대의 또다른 특수성들
여기에서 군대라는 집단의 특수성이 하나 더 추가된다. 군입대의 비자발성이 그것이다. '싸제'의 직장에서는 조직에의 편입부터가 사원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것이고, 편입되는 것이 사원의 이익으로 귀착된다. 때문에 약한 강도의 질책으로도 사원에게 큰 효과를 발휘하며, 그 강도가 심할지라도 '더러워서 때려친다' 궁시렁 소리만 할뿐, 기꺼이 조직에 남아 더이상 질책을 듣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군대에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조직에 충성할 자들만을 엄선한다면 군에 남아 있을 사람 몇 명 없다. 내무생활과 교육훈련에의 적응도와 성실도만으로 복무부적응 병사를 분류해 귀경 조치한다면, 군에 마음이 없는 사람치고 굳이 열심을 내어 복무에 임할 사람이 있겠느냐 말이다. (애국심 같은 말랑말랑한 이야기는 때려치워라. 누차 강조하지만 병역 회피가 죄인 건 병역이 신성해서가 아니라 회피한 댓가를 다른 사람이 져야 하기 때문이다.)
동기부여할 만한 유인력이 없는 곳에 무언가 동기부여를 시켜 붙잡아 두어야 하는 이 모순점 때문에, 질책하지 않고 좋은 말로 해서 부대를 운영할 수 있다는 바람은 허황된 망상에 그치게 된다. 군대는 보이스카웃 여름캠프나 잼버리가 아니란 말이다. '박 이병님. 죄송하지만 지금 참호에서 달려나가 저 쏟아지는 총알 속으로 좀 뛰어 가주셔야겠습니다' 이 따위 점잖은 말로 못 가겠다는 사람 붙잡고 진지한 카운셀링 하는 곳이 아니다, 군대는.
간부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지금도 저기 어느 부대 지휘관은 '우리 애들은 언어 폭력 안 쓰고도 잘 지내고 있어' 혹은 '나는 사병들의 언어 폭력 없이도 이 부대를 잘 지휘해 나가고 있어'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착각 마시라. 부대원의 실질적인 충성도와 즉각적인 복종은 사병들간의 유대감에서 시작된다. 통솔하는 중대원들을 그토록 이해하려고 노력한 모범적 지휘관인 윈터스 중위도 다른 장교들에게 공공연히 이렇게 말한다. "이지 중대를 이끄는 건 토코아 출신의 하사관들이야."(우리네 병장급으로 이해하면 된다.) 앞의 내 경험에서 보듯이 매니저가 성격이 좋아 불성실했던 내 근무태도를 그대로 두긴 했지만, 호프집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누군가가 총대를 매고 악역을 맡아야 한다. 그런 시스템적 기능이 '사병들의 세계'에서 작동하고 있고 전체로서의 중대, 대대, 그리고 연대, 사단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도 그런 작은 단위에서 시작하는 규율의 힘이다. '애들 갈구지 마라, 고운 말 써라' 하는 사단장의 훈시 따위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왜 꼭 악역이어야 하느냐고 묻는 얼치기들이 있을 것이다. 좋은 질문이다. '네 방 청소는 네가 해라'는 엄마의 부탁에 호응하는 정도의 자율성을 말하는가? 고등학교 선생이 '매 안 들고 야단 안 칠테니 알아서 열심히 공부해 대학 가거라' 할 때 호응하는 학생들 수준의 자율성을 원하는가? 그게 그렇지가 않은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이유로, 100 퍼센트 수준의 역량이 요구되는 집단에서 자율성으로 규율을 대신했을 때, 그 최선을 다하여 100 퍼센트의 역량을 발휘해주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100 퍼센트는 고사하고 50 퍼센트만 해주어도 감지덕지라 하겠다. 내가 소대에서 밥이 되었을 때(=실질적 권한을 얻었을 때) 관물함 정리를 각자 자율에 맡겼다. 그게 별거냐 하는 사람을 위해 부연하자면, 다른 소대에서는 관물함 안에 비치하는 물품의 종류와 모양, 길이와 높이, 폭까지 정해져 있었고, 그것에 어긋나는 관물은 전부 복도로 집어 던졌다. 흙탕에 뒤범벅이 된 그걸 다시 정리하는 게 '벌'인 셈이다. 밥이 안될 때부터 그게 너무 심하지 않은가 생각해왔고, 사실상 관물의 목적은 비상시 군장 결속의 신속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므로 정리만 잘 되어 있으면 무방하다 판단했기에, 행보관의 허락을 받아 관물함에 뚜껑을 달고 그 안의 사정에 대해서는 일체 잔소리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터졌다. 예정에 없이 단 주임원사가 중대를 방문했는데, 어쩌다 들어와본 소대가 우리 소대였고, 어쩌다 열어본 관물대가 아무개 일병의 관물대였는데, 뚜껑을 열자마자 쉰내가 진동을 하는 빨래 뭉치가 쏟아져 나왔다. 할 말이 없더라. 그날로 관물함 뚜껑은 도로 떼어내어졌고, 전중대원은 다시 내가 이등병 시절에나 보던 수준의 '각잡기 관물'을 해야만 했다. 합리적인 선에서 정리 잘 해오던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문제는 뚜껑을 달아 자율성과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싶었던 그 모든 배려의 시도에 뒷통수를 치는 불성실의 모습이 보여주듯이, 강제하지 않고는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필요한 기준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간부들 때문이다. 앞에서, 군대라는 조직이 특수성을 띠고 있고 전시를 상정하는 집단이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즉각적인 상명하복(물론 간부들은 사병간의 상명하복을 인정하지 않는다.)을 필요로 한다, 우리 군의 경우 구성원의 의지가 비자발적이므로 그러한 상명하복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과하다 싶은 질책, 이른바 갈굼도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지휘체계를 확립할 목적도 아니고 병영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도 아닌, 불필요한 기준이 제시되고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선임병들이 후임병을 들볶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나 많다. 병장이 총기거치대를 손으로 훑은 다음, 손에 묻은 먼지를 상병의 얼굴에 발라주는 것, 그게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간부들의 내무검사나 일석점호시의 꼬투리 잡기가 아니고서 말이다.
자기 방 청소도 잘 안 하는 스무 살 청년들이 무슨 철이 들었다고 브라운관 하며 옷장 상단, 거울이나 액자틀의 먼지, 심지어 오디오 볼륨 사이사이까지 먼지를 닦아내게 하겠는가? 내무검사나 일조점호시 내무실에 스윽 들어와서는 별 이상한 껀수를 다 잡아 놓고 나가는 간부들(소블 대위의 내무검사를 떠올려보라)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 병장들은 간부들이 책잡을 기준 이상으로 애들을 들볶을 수밖에 없다. 그게 어디 좋은 말로 타이르는 평균 수준의 자율성으로 가능하겠는가?
간부들은 일이등병을 위한답시고 휴일에는 선임병 눈치 보지 말고 맘껏 자유활동을 하라고 권유하면서도, 정작 휴일에는 예정에도 없는 작업(공사)을 한다며 작업병 차출 방송을 하고, 빨리 인원이 채워지지 않으면(자유활동 하러 나갔는데 인원이 있겠는가?) 인원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대장을 개박살 낸다. 그러면 그 다음 휴일부터 분대장이 일이등병들에게 잘도 나가놀라고 하겠지? 간부들이란 그런 족속이다.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생략한채, 그 결과물로서의 단물만 쪽쪽 빨아먹으며 만족해 한다.(젯털님의 말씀대로
'사병의 주적은 간부다'
. 만고불변의 진리.......)
그가 주장하는 '언어 폭력'이란 그저 '잔소리'일뿐
이 모든 내용을 종합했을 때, 그 분위기 좋았다는 소대에서 김 일병이 당했다 주장하는 '언어 폭력'이란, 사회에서 우리가 말하는 '엄마의 잔소리' 수준에 불과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양말을 뒤집어 벗어 세탁기에 넣었을 때나, 연락도 없이 귀가가 늦었을 때, 아빠가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애 성적이 이 모양이야!' 하고 윽박질렀을 때, 여러분에게 하는 엄마의 그 '잔소리' 말이다.
그것을 두고 섣불리 구타나 가혹행위와 동일선상에서 백안시하며 '언어 폭력', '모멸감' 운운 한다면 대체 군대를 어떻게 유지해 나가라는 것인지 묻고 싶다. 전투에 투입될 인원을 뽑기 위해 참호 속에서 제비뽑기나 다수결 투표라도 하길 기대하는가? 누가 선두에 설지를 결정하기 위해 지휘관이 전중대원을 모아놓고 민주대토론회라도 열어야 하는가? 절대적 평화주의자를 표방하며 군대 체제 자체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같은 부류가 아닌 이상, 군대 체제를 인정하면서 그같은 주장을 고민없이 내뱉는다는 게 이해가 안된다.
결국 김 일병은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전우들이 잠든 내무실에 수류탄을 던져 넣고 총알을 퍼부은 것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군 당국으로서는 '언어 폭력'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결론 짓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할 것이다. 지각 없는 선임병들이 언어 폭력으로 후임병들을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강구하겠다는 몇 마디면 대책은 다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생존자는 이미 타부대로 전출되었으니 희생양은 이미 준비가 끝난 셈이다. 각급 예하부대에 공문을 하달해 '병영내 올바른 언어 사용하기' 표어/포스터 경연 대회를 열고, 부대 지휘관은 수요 정훈 시간과 토요 지휘관 시간을 이용, 관련 교육을 실시하며, 오전/오후 일과 투입전 중대 막사 앞에서 관련 구호 세 번 복창하기 따위가 시행될 것이다. 그리곤 그 실시내용과 성과분석을 A4 10매 분량으로 작성해 보고하면 그걸로 끝이다.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군 당국이 좀더 양심이 있고 지각이 있었다면 '언어 폭력'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떠올리기 전에, 좀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헛점이나 간과된 부분에 눈을 돌렸을 것이다. 우선 3개조가 투입되어야 할 초소에 2개조만 투입된 것과, 밀어내기식 근무가 아닌 말뚝근무가 이루어진 점, 초병은 초소를 떠날 수 없고 반드시 조 건제단위로 움직여야 하는 규정을 아무 경각심 없이 위반한 것, 상황병이 근무자를 준비시키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김 일병이 무장상태로 내무반에 진입하는 빌미를 준 것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GP(그 어느 부대가 차이가 있겠냐마는) 자체의 임무가 내부자 공격이 아닌 북한군의 도발 사실을 초동보고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정황이 근무기강을 본질적으로 문란하게 하고 사건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기는 어렵다.
혹자는 군인이 취침시간에 TV를 보는 등의 사실이 군기문란을 증명한다고 말한다. 그 힘들다는 훈련소 6주 훈련을 한 해 30만 명의 젊은이들이 그래도 다 견뎌내는 이유가 뭔지 아는가? 말 장난처럼 들리겠지만, 그건 훈련소 훈련이 6주라서 그렇다. 훈련소와 같은 완전히 통제된 생활을 2년동안 계속해야 한다면 아마 나라도 미쳐버릴 것이다. 취침시간인 밤 10시에 시작하는 수목 드라마 한 편 보고 자는 것, 국가대표팀의 축구경기를 보고 자는 것, 그것은 군인들이 그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집단 속에서 미치지 않고 벼텨낼 수 있는 최소한의 타협의 표지이다.) 설령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중대한 기강 해이 사례라 할지라도, 정작 김 일병이 범행을 실행하기로 맘을 먹은 이상, 그것을 제지하는 데에 아무 억제력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군 기강 해이를 사건의 또 다른 원인으로 세울 수 없음을 증명한다.
또 하나, GP의 구조, 정확히는 내무반과 분리되어 있어 탄약저지선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상황실의 위치 문제이다. 그러나 이 역시 상황실에 진입하여 소초장과 상황병을 먼저 사살하기로 작정한다면 그후 김 일병의 행동은 통제할 방법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별 의미가 없다.
그럼 나는 무얼 말하고자 하는가.
총기 난사 사건의 현장에서 김 일병 이외의 그 어떤 원인점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는 시도?
우리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며 '신뢰의 이익'을 보호받는다(혹은 기대한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미친 놈에게 떼밀려 목숨을 잃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지하철을 탄다. 별안간 버스 운전 기사가 핸들을 꺾어 정류장을 향해 맹렬히 돌진해 우리를 가루로 만들 수 있음에도 우리는 버스를 탄다.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이 그와 같은 사건/사고에 대처하는 긴장상태로 지속되어야 한다면 더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어진다. 때문에 이런 희박한 확률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것을 전제한 상태를 우리는 '정상'이라고 부른다.
수년 전 일어났던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을 생각해보자. 방화범이 휘발유를 구매할 때 주유소 직원이 '혹시 저 사람이 지하철에 방화를 하려는 것은 아닐까' 착안하여 경찰에 연락, 그 사람의 병력을 조사하고 최근 신병을 비관하여 비관 자살을 하려는 징후는 없는지 조사케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게 사건의 원인인가? 지하철 모든 역의 출입구에 검색대를 설치하여 시민들의 짐을 꼼꼼히 검색해 사전에 방화범이 소지한 휘발유를 잡아내지 못한 것이 사건의 원인인가? 행색이 남루한 노인이 지하철에 올라 뭔가 짐을 만지작 거리고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데 그것을 보고 '이 사람이 사회로부터 소외받아온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지금 이 자리에서 뭔가 사고를 낼지 모른다'고 판단한 주위의 시민들이 그에게 다가가 따스한 손을 내밀며 한 20~30분 카운셀링을 해주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사건의 원인인가?
다 미친 소리라는 걸 여러분은 안다.
사건의 원인과
사건의 배경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또한 사건의 원인과 그 사건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불비한 조치는 또다른 것이다. 그것들의 개념을 헷갈려 하면 엉뚱하게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고, 억울한 피해자가 도리어 가해자처럼 바뀐다. 위에서 본 것처럼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온갖 시나리오 속에서 사건은 다양하게 차단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걸 차단할 수 없었던 것이 오히려 정상이며, 그러하리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뢰의 이익이 마땅히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희소한 확률을 뚫고서 신뢰하고 방심한 그 누군가에게 사건의 원인이 제 발로 찾아가는데,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된다. 한 마디로 재수가 없는 것이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에서 불구덩이 속에 쓰러져 갔던 시민들은 전적인 피해자다. 그리고 방화범은 우연히 그들과 함께 있었고 우연히 그들을 죽였다. 그 방화범의 행동에 대해 '이 사회의 무관심'이니 '모두가 가해자'니 하는 사회학적 평가와 반성을 멋들어지게 늘어놓을 수는 있어도,
방화범의 행동 자체를 피해자들과 인과관계로 붙들어 매서는 곤란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방화범에게는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어도 무방하며 오로지 우연에 의해 조성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범행을 실행한 것이니까. 기관사의 착오와 사령실의 지체 역시 사건의 원인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다만 피해의 크기를 줄일 수 있었던 가능성으로서의 인자가 될뿐이다.
다시 총기 난사 사건으로 돌아가자. 군 당국과 언론에서 아무리 '언어 폭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해가며 김 일병의 난사 행위에 인과관계가 될만한 요소를 만들려 애써봐도 정상적인 사람, 즉 신뢰의 이익을 보호받기를 기대하는 일반인에게 있어 '잔소리 듣기 싫어서' 수류탄을 던지고 총알을 날려대는 비정상적인 행동은 납득이 될 수가 없다. '오죽하면'이라는 수식어는 '그래도 어떻게'라는 수식어로 되돌려주고 싶다. '잔소리 = 수류탄+총기 난사'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미 사회의 신뢰 이익 관계에서 스스로 일탈한 것이며, 따라서 김 일병 그는
군대부적응자이기 이전에 이미 사회부적응자였다. 그 신뢰로부터 배신당해 죽음을 맞은 이들은 누가 뭐래도 전적인 피해자다.
김 일병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일반 직장에서 상사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을 때라도 만약 오른손에 K-1 소총이 있기라도 했으면 즉시로 갈겨댔을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과 성품의 소유자가 불행하게도 군에 입대했으며, 불행하게도 실탄과 수류탄을 다루는 부대로 배치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본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GP에서의 사건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사건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그 얘기다. TV를 시청했건, 상황병이 임무를 해태했건, 사수가 김 일병을 혼자 두었건간에 김 일병이 손에 총과 수류탄을 쥘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그 순간부터 이미 상황은 끝난 것이다. 대구 지하철 방화범이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산 순간 모든 게 결정된 것처럼 말이다. 그 외의 요소들은 사건의 원인을 차단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거나, 어떻게든 사건이 발생한 후에 피해의 범위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 하는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원칙에 입각한 근무가 이루어져야 한다든지, 상황실의 통제실로서의 기능을 재고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의 의미는 그래도 유효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같은 상황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사건의 원인은 김 일병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군대문화를 들먹이며 사건의 배경을 사건의 원인으로 도치시키는 것은 간악한 동시에 미련하며 아둔한 짓이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을 돌이켜 방화범이 앓고 있던 지병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가정해보자. 변심한 애인 때문에 홧김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생기면 어떡하겠는가? 그것도 용케 사회복지정책의 일환으로 해결했다 치자. 정부의 토지수용 보상가액이 기대에 못미쳐 앙심을 품은 시민이 불을 지른다면? 이런 식으로 나가면 끝이 없다. 신뢰의 이익 보호 범위를 넘어서는 위험의 가능성은 애시당초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건의 원인은 김 일병일 수밖에 없으며 유일한 해결책은 김 일병 같은 사람이 총기나 수류탄을 만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실적 한계로 인해 아직 징병제를 포기할 수 없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태어난 것이 우리의 원죄임을 되새기게 된다. '언어 폭력'이니 '구타'니 '근무 기강 해이'니 별 소리를 다 하고 이야기를 짜맞추려 골몰을 하겠지만 그 바닥을 파내고 파내다 보면 '대한민국의 징병제'가 그 끝에 자리잡고 있다. '가정 같은 내무반을 만들겠다' 따위의 헛소리들을 하는 것도 자꾸 보면 안쓰럽다. 욕설과 구타가 심했던 그 옛날 군대에서도 총기 난사는 있었고, 욕설과 구타가 덜한 지금도 총기 난사는 발생하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욕설과 구타가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때에도 여전히 총기 난사 사건은 일어날 것이다. 왜겠는가. 그게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한 해에 30만 명의 청년들을 좋으나 싫으나 훈련소로 집어 넣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거다.
** 연습장에 쓴 걸 급히 타이핑 하느라 퇴고를 못했습니다. 오타나 문장이 이상한 부분은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덧. 20시09분에 추가합니다.
아래는 방금 네이버 메인에 뜬 기사 제목과 실제 기사 제목을 비교해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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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메인에 걸린 제목과 실제 기사 제목의 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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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병이 자신의 목을 잡고 흔들었다는 김 일병의 진술이 기사에서 '폭행'으로 설명되어 있고, 인권위는 때를 만난듯 '폭행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기사는 메인에서 '구타'로 승화(?)되었습니다. 대단하다는 말밖엔 안나옵니다. 폭행이든 아니든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기사를 보면 아시겠지만 인권위는 해당부대의 소원수리 내역을 살펴본 결과, 여러 가지 부조리한 일이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벌써 어제부터 계속 떠들던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GP와의 관련성은 스스로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교묘한 언론플레이란 생각밖에 안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