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켄지의
<메모의 기술>
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을 계획하기 위해 차분히 생각을 할 수 있는 서재와 같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실 서재라는 개념은 영미 소설에서나 접해본 것이지 우리 나라에서 집에 서재를 두고 있는 서민들이 몇이나 있을까. 양장본 서적이 꽉 들어찬 서가에 고풍스러운 양탄자, 그리고 적갈색 원목으로 짠 책상...... 아마 대기업 회장이나 사장 쯤이나 되어야 떠올려 볼 법한 상상 아닌가.
여기까지는 예전에도 해봤던 생각이다. 그런데 <메모의 기술>을 읽다 떠오른 것은 조금 달랐다. 서재란 곳은 결국 '공부하는 방(study room)'이다. 시끄러운 텔레비전과 번잡한 주방, 전화벨 소리, 쿵쾅거리며 뛰노는 아이들이 상주(?)하는 가정 안에서 분리되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학생들이 굳이 도서관이나 독서실에 가는 이유가 '공부하는 분위기'를 찾는 것이고 보면, 서재는 직장인인 가장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자녀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기능공간이 된다. 더 나아가 전업주부인 어머니들이 책 한 권을 읽으려 할 때도 마음 편히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결론인즉,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에게 자신만의 책상을 갖는 독립된 공간이 서재라는 얘기다.
그러면 과연 그만한 공간을 할애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25평 미만에 방이 3개가 안되는 집에서는 구조적으로 도리가 없다. 그리고 자녀가 하나일 때는 문제가 없지만 둘일 때는 성별이 같아야 한다. 딸 둘을 둔 부부를 가정하고 아래의 모 아파트 28평형 평면도를 보도록 하자.
<개요>
1. 북향 방 1개를 서재로 꾸민다.
2. 자녀의 방에는 이층 침대를 들이고 옷장과 화장대를 제외한 모든 가구는 생략한다.
3. 2에서 생략된 가재도구는 부부방에 수납한다.
평면도에서 서재로 꾸며진 방의 폭과 길이는 2.7m 정도이며 책상의 길이는 1.1m, 책상 사이 통로의 폭은 0.5m이다. 구조변경된 부분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출입문이 안쪽 여닫이였던 것을 바깥쪽 여닫이로 바꾼 것이다. 책상 네 개를 넣으려니 도저히 공간이 안나왔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방과 연결된 베란다문을 뜯어내고 바닥과 벽에 단열재 처리를 한 후 마루를 깔았다. 개방된 창에는 알루미늄 섀시처리를 한 다음 에어컨을 달았다. 베란다는 서가로 활용되는 곳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책상 네 개를 넣으면 전혀 공간이 남지 않기 때문에 베란다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아래는 대략적인 상상도이다.
약간 과장된 그림이며 실제로는 저렇게 넓을 수가 없다. 천장에 달려 있는 오스람 계열의 전등은 때어내고 할로겐 램프 한 개만 달아서 최소한의 조명만을 유지하도록 한다. 베란다 서가 쪽도 마찬가지다. 서재의 조명은 각 책상에 달린 스탠드 전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프린터와 스캐너는 공유케이블로 연결하여 베란다 서가쪽 남는 공간에 둘 수 있다. 폐쇄형 공간에 가까우므로 공기청정기를 별도로 유지해야 할 것이다. 요즘은 에어컨에 공기청정기가 딸려나온 것도 있으니, 에어컨은 서재에만 갖추고 거실과 각방에는 선풍기 정도로 끝내도 괜찮을 듯 싶다. 더우면 서재에 가서...... 공부를 하든 책을 읽든 하란 얘기가 된다.
가족 서재를 정착시키는 핵심은 침실과 서재를 기능적으로 얼마나 잘 분리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침실을 그야말로 '잠만 자는 곳'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침대와 옷장, 화장대 외엔 가구를 생략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각종 문구류나 자그마한 책과 수첩들, 집기들, 액자와 사진, 씨디와 디브이디 타이틀, 엠피쓰리 플레이어와 카메라 따위는 전부 서재에 있는 자기 책상 서랍에 몰아넣어야 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옷을 입은 이후부터 다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는 서재와 거실만이 생활 공간이 된다.
생각해보자. 아빠가 직장에서 마무리 못한 업무를 마치기 위해 서류를 들고 서재에 들어간다. 수업을 마치고 하교한 딸 아이는 저녁을 먹은 다음, 잠시 텔레비전을 보다가 가방을 들고 서재로 들어간다. 자유기고가로 일하는 엄마는 원고를 다듬기 위해 서재로 들어간다. 할로겐 램프가 켜진 어두운 서재. 책상 세 개에 불이 켜져 있다. 출입문은 흡음재로 재시공되어 더없이 조용하다. 책상마다 랩탑 혹은 데스크탑이 구비되어 있고 모두 헤드폰을 끼고 있다.(잡음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음악이나 일정 주파의 백색소음을 듣고 있다.) 휴대전화는 모두 진동상태이며, 전화가 오면 나가서 받는다. 서재 한쪽 벽에는 액자가 걸려 있다.
※ 서재 이용시 주의사항 ※
1. 절대 정숙 (문살짝, 휴대전화는 진동으로)
2. 냄새나는 음식 반입 금지 (커피는 허용)
3. 바닥청소 철저 (월화:아빠, 수목:엄마, 금토:딸래미)
주의사항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닥청소는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하는데, 진공청소기로 훑는 정도로 끝내면 된다. 자기 쓰레기통은 자기가 비운다. 책상 위에 무슨 짓을 해놓든지 신경쓰지 않는다. 보던 책을 탑처럼 쌓아두었건, 프라모델을 조립하다 방치하건, 마시던 물컵을 일 주일간 놔 두건, 일절 참견 하지 않기로 한다.
굳이 가족 서재를 꾸밀 이유는? 차라리 아이들에게 각자 방을 주고 책상을 꾸며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부부에게도 책상이 필요하다면 마찬가지로 책상을 갖추면 되지 않는가? 말은 쉽지만 얼마나 효과적일지 의문이다. 침대와 따뜻한 이불 옆에서 공부(업무)하는 것과 오직 공부만을 위해 준비된 공간에서 책을 펼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요즘은 방마다 거실과 별도로 텔레비전을 두는 곳도 많다. 큰 방해요소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개방된 공간, 환한 조명 아래서 어떤 하나에 집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을 닫아도 거실의 텔레비전 소리가 흘러들어오고, 주방의 설겆이 소리가 다 들린다면 더욱 낭패다.
어떤가? 어젯밤에 이 상상하면서 무척 즐거웠다. 상상을 현실로 옮길 여건이 언제가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빠와 엄마, 두 딸아이가 한 방에서 함께 공부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정말 멋지다.
명 오늘 
명
PRINT Text
PRINT 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