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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 대한 비판의 9할은 '지나치리만치 잔인하게 묘사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멜 깁슨의 다분히 상업적인 고려가 가미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같은 지적에 일정 부분 공감의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만, 직접 보고난 지금은 절대로 그렇지 않음을 장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이 짧게 스크립트 처리 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이 성경말씀은 예수가 이 땅에서 살았던 짧디 짧은 공생애의 당위성을 가장 비극적으로 축약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천년이 흐르며 말씀에 담긴 당위성은 잘 다듬어진 교리와 학습 속에 충실히 전해내려져 오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안에 공존했던 비극성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고 그 망각 속에 씻겨 내려가는 수많은 돌멩이들 중에 예수가 당했던 고난과 흘린 피의 쓰라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극성을 심정적으로 공유했냐 공유하지 못했냐 하는 것은 때로 상대에 대한 이해의 본질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만년의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묘소 앞에 꿇어 앉아 눈물을 글썽 거려도 우리는 그 마음에 차오르는 비통함과 회한까지 읽을 수는 없습니다. 2시간 동안 스필버그가 묘사한 전쟁터로 들어가 그 둘이 함께했던 모든 기억의 시간과 고통, 고뇌를 목도한 후에야 비로소 그 눈에 담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바다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늙은 할아버지, 아버지를 가벼이 다독여 주는, 아무 것도 모르는 라이언의 자녀들과 손주들을 봅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무 것도 모릅니다. 라이언이 수없이 설명하고 이야기 해주었어도 그들은 우리 관람객이 느낀 것들의 십분지 일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극성이 공유되는 것과 공유되지 못한 것이 갖는 차이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예수의 영광과 권세에 압도되어 있었습니다. 간혹 설교를 통해 그가 맞은 채찍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는 말을 들은즉 그것을 상상하기도 힘들 뿐더러 우리가 추종해 마지않는 예수의 신성에 함몰되어 '하찮고도 불미스런 경험'쯤으로 치부해버리고 맙니다. 예수가 잡히시기 전, 그토록 기도를 하시어 땀이 피가 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마저도 그분의 놀라운 능력의 하나로밖에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리도 절박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한 줌 모래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라이언의 주위에 서 있던 그의 가족들처럼 말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이사야서 53장 5절의 말씀입니다. 때로 시적인 감성마저 느껴지는 이 귀절은 예수의 고통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것으로만 우리는 이해하였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이해의 폭이란 그저 "도살자의 칼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어린 양의 슬픈 눈매" 따위의 싸구려 감상주의에 불과하였습니다. 나를 밀쳐내고 대신 자동차에 치이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얕은 감상이 자리잡을 여지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가 가진 감상의 폭은 일간신문 사회면 단신 처리된 기사에 실린 비극에 대한 반응만도 못한 것 같습니다. 멜 깁슨은 그래서 담담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말씀이 당신 안에 얼마나 빛바래져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겠다고...... 그가 처참한 예수의 고난, 혹은 수난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묘사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또 하나의 싸구려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뼈아픈 비극의 공유를 통해 2천년전 예수의 모습은 우리 안에 살아 숨쉬는 기억이 됩니다. (그가 영화 모든 대사를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채용한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덧.
동시에 두려움이 함께 합니다. 예수는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땅의 교회에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요?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수만명이 모인 기도회에서마저 원수에 대한 저주가 홍수를 이룹니다. 목사들과 교인들은 싸우고, 재물을 탐하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런 형편에, 예수의 음성과 얼굴을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본 비기독교인이 혹 교회를 찾는다면, 그가 느낄 당혹감과 배신감은 누가 감당을 합니까?
그러므로 오히려 지금의 기독교계가 각종 이벤트를 통해 이 영화를 하나의 전도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영화를 보아야 할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처럼 더이상 예수의 고난에서도 죽음에서도 부활에서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차가운 기독교인들입니다. 따분한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 나랑은 관련없는 시시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은 정작 기독교인이어야 합니다.
nkino 회원 아이디 : reedyf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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