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달린 냉장고
위 스샷은 <좌절 아줌마(국내에선 '위기의 주부들'이란 제목으로 방영)> 6부 중 한 장면이다. 냉장고가 아니라 찬장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같은 설정이다. 듀나가 말한 이 클리셰의 몇 가지 기능 중 '리듬감과 새로운 시점의 부여'에 속한다.
수잔이 어이없는 부탁을 하자 딸 줄리가 반박하며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다. 빠르게 대화가 오고 가는 가운데 둘 사이의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이 장면은 빠른 컷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더해 연출자는, 대화의 일상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줄리가 찬장에서 컵을 꺼내 음료수를 따라 마시는 연기를 하도록 주문했다. 그런데 줄리가 찬장으로 다가가 컵을 꺼내는 모습이 롱테이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잔에게 카메라를 넘겨버리면 줄리의 동작이 분절되어 버린다. 즉, 관객은 찬장에 다가가는 동작과 컵을 이미 꺼낸 동작밖엔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줄리를 잡은 카메라의 앵글을 바꿔줄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미 줄리가 벽쪽으로 이동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른바 '180도 법칙'을 지켜줄 수 있는 카메라의 위치가 애매해진다. 그래서 나온 최선의 선택이 '벽장 속의 시선'이다. 벽장 속의 카메라는 줄리와 함께 맞은 편에 서 있는 수잔까지 아웃 포커스된 상태로 담아줌으로써 '180도 법칙'의 마지노선을 준수해주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잔이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이죽거리고 있는 줄리의 표정까지 연속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빠른 대화가 오고가는 가운데 한 인물에게 카메라를 질질 끌지 않고, 그러면서도 분절되지 않는 리듬감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듀나가 지적하지 않은, '냉장고 안 카메라'의 또다른 기능은 '동작의 사실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냉장고든 찬장이든 드라마 속에서는 하나의 소품에 불과하며 엄청난 디테일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관객에게는 '주인공이 냉장고(찬장)에서 무언가를 꺼낸다'는 동작을 전달하면 충분하다. 그것이 정말 주인공이 사용하는 냉장고(찬장)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도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냉장고(찬장) 속이 현실 생활과는 달리 과도하게 깔끔하다거나 횅댕그렁하다는 사실을 별 문제 삼지 않으며, 많은 경우 카메라에 보여지는 부분만 면피하기 위해 꾸며진 것이란 점을 은연 중에 이해하고 넘어간다. 경우에 따라선 주인공이 냉장고(찬장) 문을 여는 컷과 사과를 들고 몸을 일으키는 컷의 조합으로도 (실제로는) 텅텅 빈 냉장고(찬장)가 소품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한 것이 된다.
그러나 냉장고(찬장) 안에 카메라를 집어넣음으로써 연출자는 '이것은 진짜다'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어필한다. 벽을 치우면 촬영 스탭들이 뻘쭘하게 서 있는 세트장의 소품이 아니라, 주인공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문을 여닫고 음식을 꺼내 먹기도 하는 진짜 냉장고(찬장)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냉장고라면 절대 (카메라가 설치될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 있지 않겠지만, 오히려 이런 비현실적인 기법이 주인공의 동작이 좀더 사실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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