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그는 눈 딱 감고 지나가자 했지요.
고운 것, 위대한 것, 맛난 것만 구경해도 백년 인생이 짧으니,
연꽃의 우아함만 살피면 되지
그 꽃을 피운 탁한 물에 구태여 손을 담글 필요가 없다고 했답니다.
가볍게, 가볍게, 철 따라 마음 따라 노래부르며,
속세의 시름 모두 잊고, 벌거벗은 몸 맨머리를 향해
불어오는 솔바람이나 맞으며 늙어가기를,
예전에 나도 간절히 원했었지요.
이제 그와 나는 갈림길에서 영원히 합칠 수 없는 방향으로
제각각 들어서야 했답니다.
파국의 고통보다는 때 이른 결별의 아쉬움을 택한 겁니다.
그 늦가을 이별의 시로 봄을 읊은 것은
우리가 봄에 처음 만났기 때문일까요.
그 봄에 벌써 머물지 않을 봄과 떨어지는 꽃을 염려했던 탓일까요.
당신은 나예요, 자신있게 속삭이던 나날도 끝이 났답니다.
-- 김탁환 <나, 황진이> 중 '너는 나다' 에서
# 2.
너는 나다,
혹은 나는 너다,
라고 자신있게 말한다는 게 어떤 것인가.
뿌듯하고 떳떳하고 열정적인 커플이 되는 거?
너만을 사랑한다 맹세하는 거?
당신은 나예요,
라고 자신있게 속삭이던 나날의 끝,
그 끝에 한 잔 건배하고 싶은 글구다.
연꽃,
그 아래의 흙탕물에도...
모든 헤어짐,
그리고 그 헤어짐이라고 부를 것도 없이
접어야 했던 숱한 마음들에 대해서도...
# 3.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거야
때로는 보고파 지겠지
둥근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 날을 후회할거야
산을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멀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거야
서영은이 부르는 <이별>
참 촌스런 가사인데 서영은이 부르니 좀 다르다.
어쩌다 들은 노래 한 곡에 울컥-
# 4.
아오리 한바구니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다.
한 개씩 집어들 때 마다
오버랩되는...
최면을 걸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유치한 위로라도...
그냥, 지나가 주길 바랄 뿐.
이 감정, 이 느낌이...
# 5.
사계절을 다 앓는
날씨타령 계절타령
여유작작 이 놈의 한량체질,
가을이 오는 신호로
그리움 타령 심각.
때맞춰 시름시름 감기까지 최절정 설정.
이런 날
있어주면 좋잖아.
말 없이
그냥 옆에 있어주면
좋잖아.
누군가의 표현처럼
나한테 얘기하려는 사람들 가득인데
내 얘기 들어주면 좋잖아.
기억할 것들 잔뜩 남겨둔 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는 사람들은
다 혼을 내줘야 해.
하는,
부질없고 진부한 양식의 감정들이
자꾸 찾아와 마음에 앉는다.
쪽팔리니까
새를 쫓는 심정으로
자꾸 손을 저어 보는데
얼굴 버얼겋게 만드는
감기약 만큼이나
눈동자를 풀리게 하네.
곁에 있었으면
같이 만화동산 가서 두어 권 읽고,
좀 걷다가
'미네르바' 가서 사이폰 커피 마시고
낡은 LP로 몇 곡 들으며
나즈막히 몇 마디 나누다가
집에 갈텐데.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괜히 마음 꽉 차는 대화.
미네르바를 어떻게 가더라..
이젠 가물가물한데.
참 신기하게
해마다 그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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