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섬 바닷가 - 치명적 향기'

# 1.

요즈음,
유난히도 지하철을 많이 타게됩니다.

얼굴 못 봤던 사람들을 만나느라
그들이 자리 잡고 무언가 하고있는
강남, 광화문, 여의도, 홍대..
그렇게 맥주 한 잔을 부비러 오가는 걸음이
제법 길게 여겨지는데요..

어제는 인천에 갔다가 막차를 기다리며
구로역이었습니다.

한 여자를 봤습니다.

나이는 마흔 즈음 되었을 법 하고,
비싸지 않은 옷감으로, 부인 외출복으로 만들어진 비둘기색 원피스.
정성스럽게 외출을 준비한 것 같은
역시 시장 언저리에서 샀을 것 같은 어깨에 맨 핸드백.
세련되지 않게 그린 다홍색 입술, 갈색 눈썹..
촌스럽다고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은 스프레이를 뿌린..앞머리.
하루종일 땀을 흘린 흔적이 역력한 고단한 얼굴, 그러나 여성스러운 미소.
하얀색 스타킹..
통굽 구두..

그 즈음 시선이 머문 것은 그녀의 구두였습니다.

시선을 가다듬고 보아도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 구두.

다시 보니 그녀에게는
다리가 하나였습니다.

왼쪽 다리.

다른 한 다리의 몫까지 하기 위해
그렇게 고단한 세월을 살아온 것만 같은.

지하철이 오고
옆자리에 앉게 된 그녀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배움이 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참말이지 따뜻하고 조용했습니다.

지하철의 취객들,
삶의 소소한 때가 묻은
술 냄새와 개똥철학이 가득한 밤의 지하철에서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 온 사람일지가
그려지는 것만 같아서
한 동안은 그녀의 우울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이
기억 속에 머물 것 같습니다.

# 2.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면
태백의 어느 여인숙입니다.

가장 친했던 여자 선배를 하늘 나라로 보내고,
혼자 여행을 떠났던 그 밤.

난생 처음 낯선 곳에서
아무 대책없이 잠을 자야겠는데,
더 이상 돌아다니기는 무섭기도 하고
그래서 태백 역에서 가장 가까운 여인숙을 찾았는데..

옆 방에서 얘기하는 잔잔한 소리마저
울림으로 전부 전해져오는
그렇게나 낡고 구저분한 방이었죠..
우울한 상실감에 걸맞는.

몇 시간 쯤 지났을까..

피곤함에 자다가 깨어났는데,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고
옷을 입은 채로 짐도 풀지 못하고 불켜진 방에서 홀로 깨어나는 마음.

그리고 술취한 노랫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무리 젊어도 마흔 댓살은 되었을 것 같은 여인의
너무나 구성진 노랫소리.

술에 취한 걸까..
혼자 있는 걸까..
지금 슬픈 걸까..

무엇이 저 여인의 가슴에서
저렇게 슬플 수 있는 가락을, 언어를 만들어 낸 걸까..

이후로도 한참을 그렇게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태백에서의 밤을 지낸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그녀의 소랫소리가
하나의 장면이 되어
가슴 어딘가에 있다가
누군가의 사연이 궁금해질 때마다
그렇게 생각의 언저리로 오르는 걸 보면
사람의 기억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가끔은,
다시 찾아가 확인하고 싶어지네요.

# 3.

한 마디의 말,
그것이 잠깐의 실수라 변명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의 치명적 향기를 드러내고야 만다..

소설가 이윤기 씨가 어느 강의에선가
언어를 대하는 두려움을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여 이후로,

어떤 표정, 어떤 어휘들을 만날 때마다
그렇게 순간의 모습일지언정
그의 무언가를 드러내는구나..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나봅니다.

근간에 저는,

아..내가 이만큼의 깊이,
뻔히 바닥이 보이는 정도의 사람이구나..
내 마음속에 그런 생각들이 가득하구나..

그래서 그것이 어떤 말 하나로,
어떤 표정 하나로
누군가의 마음에 그려졌겠구나..하는 생각을
유독 많이 하게됩니다.

뻔한 얘깁니다만,
그래서 가급적 좋은 생각이 맘 속에 가득했으면 좋겠고,
사람을 세워주고 살리는 마음이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되나 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만나더라도
참 따뜻하고 좋은 할머니가 되어가는 즈음이
지금이면 좋겠다는..

그래서
지나간 시간들을 아쉬워하며 한숨지을 필요 없이

옛날보다 훨씬 더 근사하고 깊은 표정이 그려지는
그런 얼굴이 되고 싶은데..

학습으로 다 메울 수 없는,
참말 지독히도 내성적이었던 유년기의 시간이
종종 차가운 표정과,
방어적인 눈빛으로 거울에 비춰지는 것을 보면..
그것 참..

하여 더욱
그런 순간들까지도 깊이 사랑해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절대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마음 아시죠..?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겐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 없이
그저 가서 안기면 될 것 같은..

일요일이라 그런지요..
이런 저런 얘기를 막..하고싶네요.

서른 즈음에 다다르는 시간들이
참 애틋합니다..

이곳의 치명적 향기에 끌려
자유게시판 낙서장 삼아
엄살오바 주책낭만 모드로
열심히도 끄적댔네요
심지어는 심술심통까지;;;;

허나, 즐거운 도배활동 잠시 쉼표.

올 여름 제게 주어진 소명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아웃리치 떠나요.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시길...
모두들 보고 싶을꺼에요

(얼마나 가있는다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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